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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유정, 4

by 핫PD 2011.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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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도무지 글을 함부로 쓰는 계집애!』하고 나는 좀 불쾌하여서 일기책을 주먹으로 탁 쳤소. 그러나 다음 순간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소. 왜? 나는 기억하오. 정임의 말과 같이 우리가 원산을 떠나려던 전날,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정임, 순임, 두 애를 데리고 우리가 있는 숙소에서 꽤 먼 데 있는 두 아이 선생집에 작별을 갔었소. 선생 집에 가서 이야기도 하고 수박도 먹고 놀다가, 순임이년은 선생 집에 놀러 왔던 제 동무하고 시내로 놀러 나간다고 가 버리고, (뒤에 아니까 순임이년은 그 동무의 오라비와 함께 활동사진 구경을 갔더라오.) 암만 기다려도 돌아오지를 아니하기로 할 수 없이 정임이만 데리고 우리 숙소로 돌아왔소. 이날은 정임의 일기에 있는 모양으로 동남풍이 많이 불고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물결은 아우성을 치는 밤이었소. 이러한 밤길을 바닷가 쪽으로 걸어서, 또 송림 사이로 걸어서 아마 반시간이나 넘어 걸어서 숙소로 온 것이요. 이것을 정임이가 그 일기에 그렇게 유난하게 써 놓은 것이요. 그야 캄캄한 모래판, 나무판 길도 없는 데로 오는 동안에(거기는 모래가 쌓여서 높아진 데, 패어서 움쑥 깊어진 데, 잔솔포기, 풀포기 같은 것도 있는 곳이 아니요? 갈마 앞에 말이오.) 몸도 서로 스칠 때도 있고 정임이가 쓰러지려는 것을 내가 어깨를 붙들거나 허리를 뒤로 안아 일으킨 때도 있었소. 제가 손을 내밀어 내 팔에 매달린 때도 있었소. 그러나 그저 그뿐이오.


둘이서 한 말이라고는,
『동무나 있느냐?』
『별로 없어요. 퍽 외로워요.』
『몸조심해라.』
『제가 편지 드리거든 답장 주세요.』
이런 문답과,
『졸업하고라도 더 공부가 하고 싶거든 내게 말해라, 학비는 염려 말고.』
『일본 있기가 싫어요.』
이런 말이 있었을 뿐이오.
그런 것을 정임은 이 날 밤의 일을 무슨 큰 사건이나 되는 듯이 일기에 적어 놓은 것이요. 철없는 계집애라고 생각하였소.
그러나 제가 얼마나 외롭길래, 또 세계 유일한 친구인 내 곁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간절한 소원이길래, 이 반시간 남짓한 단둘이의 산보를 그처럼 감격하게 생각하나 하면 눈물을 아니 흘리고 어찌하겠소. 사실상 정임이가 여름 내내 집에 와 있어야 나하고 단둘이 있어 본 순간은 실로 이 날 밤 한 번밖에 없었던 것이요.
나는 일기를 읽어 여기까지 와서는 내 아내가 성낸 이유를 알았소. 또 당연하다고도 생각하였소.
나는 이 구절에 대하여 아내에게 변명을 하려 하였더니 아내는 밖에 나가 버리고 없기로 일기의 그 다음을 더 읽어보았소.


잠이 아니 온다 새로 『. 세 시를 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잠이 아니 온다. 아니
그리운 이의 생각. 원산 해안의 그 날 밤의 추억! 내 생명에서 그 순간을 떼어버리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없다! 아아, 가엾은 내 생명이여!』
아마 이것이 정임이가 불면증이 생기는 시초가 아닌가 하오.
이로부터 정임은 자기의 내게 대한 감정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보려는 말이 많이 나오오. 일례를 들면,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사랑인가. 사랑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내가, 이렇게 어린 딸 같은 계집애가, 설마 아버지 같은 그 어른을 사랑함이야 될까. 이것이 사모한다는 것인가. 딸이 아버지를 사모하듯이 사모한다는 것인가. 사모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러한 논단도 있고,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한 일이 없다.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그 어른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사모하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 어른이 내 마음을 알아주시든지 말든지, 나만 혼자 내 가슴속에 그 어른을 두고 밤낮에 생각하면 그만이 아닌가. 그러나 보고 싶은 것은 어찌하나. 그이의 옷자락이라도 손끝이라도 스치고 싶은 것은 어찌하나.
나는 이러다가 말라죽는 것이 아닐까. 오늘은 체중이 줄었다고 학교에서 걱정을 하였다. 내 기름은 그이를 사모하는 불로 타 버리고 만다. 기름 다한 등잔불 모양으로 내 생명은 진해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이 간절한 생각을 누구에게 말해 보지도 못하고 영원의 어둠 속으로 스러져 버리는 것이나 아닐까.


『그래도 좋다! 그것이 좋다! 타고 타다가 진해 버려라!』
이러한 말도 있소.
각혈하기 바로 며칠 전에 정임은 이러한 말을 적어 놓았소‒‒‒‒
『내 사랑하는 이시어! 나는 당신 곁으로 다가가고 싶습니다. 다가가서 당신의 품에 안기는 서슬에 죽어 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저도 당신 품에서 죽는 것이 아니야요.
남들이,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기로 그때에는 벌써 늦지 아니하였어요? 내 시체를 때리고 거기 침을 뱉고 갖은 욕설과 갖은 악형을 다 하라고 하시오. 그것이 무엇이야요? 나는 당신의 몸에 안겨서 죽지 않았어요?
나의 사랑하는 이! 나는 더 참을 수 없읍니다. 나는 당신 계신 곳으로 갈 테야요. 내가 가면 「이년!」하고 발길로 차시겠습니까. 그래도 좋습니다. 나는 당신의 발길을 안고 죽어 버리렵니다. 나는 가요! 나는 가요!
내 몸은 더할 수 없이 약해졌습니다 . 내 기운은 줄어듭니다. 이러다가는 나는 당신 계신 곳에 갈 기운도 없이 죽어 버릴 것 같습니다. 아아 얼마나 애처로운 일이야요.
얼마나 기막히는 일이야요?
내가 인제 큰 병이 들어서 죽게 된다면 당신은 와 주시겠습니까. 오셔서 오,
가엾어라, 내 딸 정임아 하고 나를 안아 주시겠습니까. 그렇다 할진댄 오,
하나님이시여, 내게다 죽을 병을 주소서. 내가 사랑하는 그 어른을 뵈옵고 죽을 큰 병을 주소서!』
이런 소리를 썼소. 마치 제가 무서운 병이 생길 것을 미리 짐작이나 한 것 같아서 나는 몸에 소름이 끼쳤소.


이렇게 나는 정임의 일기를 보다가 문 밖에서 내 아내의 음성이 들리는 것을 보고 이 일기를 얼른 감추어 버렸소.
이 일기를 내놓으라고 내 아내는 여러 번 야단을 하였지마는 나는 결코 이것을 내놓지 아니하였소. 첫째로 아내가 이 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선전의 재료로 삼을 염려가 있고, 둘째로는 정임의 일생의(만일 이번에 정임이가 죽는다고 하면) 유일한 유적을 내 아내가 무슨 방법으로든지 욕을 보일까 봐 두려워한 것이요. 그렇지 않아도,
『그년의 그 더러운 일기책 어디 갔니? 뒷간에 버리기도 되려 미안한 그 일기책 어디 갔어?』
하고 울고 야단을 하였소.
나는 이 일기책을 다른 데 갔다 맡길 수도 없고 어디 한 곳에 두었다가는 반드시 발각이 나겠고 그래서 오늘 여기, 내일은 저기‒‒‒‒‒이 모양으로 옮겨 감추었소. 하루는 내가 그 일기책을 책장 꼭대기, 이를테면 지붕에 감출 때에 순임이한테 들켰소. 순임도 무론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를 알고 있소. 순임이뿐이오? 온 집안 사람이 다, 내 아내는 정임의 일기를 찾으려고 죽을지 살지를 모르고, 나는 그것을 감추느라고 애쓰는 것을 알고 있소. 내가 아침에 집만 뜨면 내 아내는 어멈, 아이 보는 계집애 할 것 없이 총동원을 해서 이 일기를 찾느라고 집을 발끈 뒤집는다는 말을 들었소. 그러니까 순임이가 모를 리가 있소.


순임은 내가 정임의 일기책을 감추다가 들켜서 머쓱하는 것을 보고는 못 본 체하고 획 나가더니 일 분도 못 하여 다시 들어와서,
『아버지 그것을 왜 태워 버리지 않으세요? 어저께도 어머니 눈에 들 뻔한 것을 내가 얼른 집어 감추었답니다. 왜, 거기 두면 못 찾나요? 아버지두. 번번이 내가 없다고 어머니를 속이고 감추고 하니깐 그렇지.』
하고 마치 불쌍한 범죄자를 타이르듯 한 태도로 말을 하는구려. 내 속이
어떠하였겠소?
나는 교의에 펄썩 주저앉아 테이블에 두 팔을 세우고 두 손에 내 얼굴을 파묻었소. 이윽히 눈을 감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순임은 내 책장에서 양장한 허름한 책 하나를 꺼내어서 그 알맹이를 뜯고, 비인 껍데기 속에 내가 애써 감추던 정임의 일기를 넣어서 요리조리 검사해 보고 보통 책들 틈에 끼우고 있소. 그것을 꽂아 놓고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것이 눈에 뜨이나 아니 뜨이나를 검사하오.
나는 눈물이 흐르고 느껴 울어짐을 금할 수가 없었소.
『아버지 인제 염려 마세요.』
하고 순임은 찡그린 내 낯을 바라보오.


『순임아.』
하고 나는 평생 처음 정답게 불렀소.
『네에?』
하고 순임도 아비의 이 비참한 꼴을 보고는 고개를 숙여 버리오.
『너 그 일기 보았니? 정임이 일기 말이다. 읽어보았니?』
하고 나는 그 대답을 무서워하면서 물었소.
『그럼요. 어머니가 오는 사람마다 불러 놓고는 낭독을 한걸요. 김 목사도 보고 여러 사람이 보았답니다. 암만 보이지 말라니 들으시나요? 사람만 오면 어머니는 신이 나셔서 그것을 내어놓고 읽으신답니다. 요새는 그것이 없어서 못 하시지요. 그걸 못 하시니깐 더 화만 내시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버지 태워 버리셔요. 그건 무엇 하러 두세요?』
하는 순임의 어조는 내게 대해서 적더라도 적의가 없는 것만은 밝히 보이오.
『그래 너도 읽었어?』
하고 나는 다른 문제보다도 순임이가 이 일기를 읽었는지가 걱정되었소.
『그건 물으시면 무얼 합니까.』
하고 순임은 내 모자를 솔로 떨어 주오. 그 뜻은 무론 다 읽었단 말이오.
『너도 네 어머니와 같이 생각하고 있니? 너도 일기 문구를 그렇게 오해하고
있니?』 하고 나는 마침내 순임이도 그 일기를 본 것으로 가정하고 문제의 요점을 들었소.


『몰라요. 어서 학교에 가셔요, 아버지. 어머니 또 오시면 어떡해요?』
하고 순임은 제 손으로 먼지를 떤 모자를 내 앞에 놓고는 밖으로 나가 버리오. 그 태도가 마치 아비를 불쌍히는 여기지마는 사람으로도 안 보는 태도였소.
그러면 벌써 이 일기 속에 씌어 있는 말이 내 아내의 해석을 통하여 서울 안에 누구누구 하는 사람들 중에 퍼진 모양이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동경 다녀와서도 학교에도 다니고 교회에도 다닌 것을 생각하면 전신에서 식은땀이 흐르오. 그러나 저러나 이 일기책은 대관절 어떤 경로를 밟아서 내 아내의 손에 들어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었소. 다만 동경 정임이가 있던 기숙사에 한 방에 있다던 키 큰 여학생이 마음에 지필 뿐이오.
생각해 보면 그 여학생이 나를 도무지 대수롭게 알지 아니할 뿐더러 적의를 가진 눈으로 힐끗힐끗 보던 것이 생각되고, 또 정임의 병실에 한 번 찾아왔을 적에는 나를 보고는 인사도 잘 하지 않던 것을 기억하오. 그렇다면 이 여자가 정임과 서로 좋지 아니하여서 그 일기책을 훔쳐서 내 아내에게로 보낸 것이나 아닌가 하고 생각했소.
그리고 정임의 병명도 내 아내가 분노할 병명으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하였소. 나는 언제 한 번 순임을 보고 물어 보려 하였으나 도무지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여 못 물어 보았소.


그러나 그까짓 것은 다 둘째나 셋째 가는 지엽 문제요, 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하는 것이 나를 내려 누르는 큰 문제가 아니요?
그것은 어느 월요일이었소. 나는 조회 시간에 생도들에게 「여자를 존경하라, 여자를 희롱하는 생각을 가지지 말아라.」하는 훈화를 하였소. 그것은 전날 신문에 어떤 학교 학생 셋이 지나가는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어떤 의분있는 행인과의 사이에 말썽이 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느낀 바 있어서 한 말이었소. 그랬더니 첫 시간인 사년급 수신 시간에 나는 가장 엄숙한 안색과 태도로 출석부와 교과서와 분필갑을 들고 교실로 들어갔소.
출석부를 부를 때부터 교실에는 끼득끼득 한두 사람의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원체 까다롭게 굴려고 아니하는 나는 그런 것을 못 들은 체하였소. 그리고 태연히 출석부를 다 부르고 나서 책을 펴놓고 교수를 시작하려 할 때에 사십여 명 학생 중에서 거진 반수나 되는 듯싶도록 교실을 흔들게 웃었소.
아무리 까다롭지 못한 나로도 낯이 화끈하고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서,
『웬 일들이냐?』
하고 소리를 질렀소. 내 소리는 교실 유리창이 울리도록 크고 또 떨렸소. 이전에 없던 성난 소리에 학생들은 웃음을 그쳤소. 나도 내 음성이 어떻게 그렇게 컸던가, 또 떨렸던가를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소.


아이들이 정연해지기로 나는 더 추궁하려고 아니하고 다시 강의를 시작하려고 하였소. 그러나 내가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들은 또 소리를 내어 웃었소. 아주 유쾌하게 그리고 조롱하는 듯한 웃음이었소. 이에 나는 필유곡절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덮어 놓고 무서운 눈으로 학생들을 노려보았소. 내 눈을 보고 마음이 약한 아이들은 시치미를 뗐으나 평소에 다소 불량성을 띤 놈들은 「허, 허」, 「하, 하」하고
분명히 선생이요 교장인 내게 대하여 적의와 모멸을 표하였소.
『선생님.』
하고 한 학생이 일어나며,
『저희들은 칠판에 써 놓은 저 글이 우스워서 웃었습니다.』
하고 손가락으로 칠판을 가리키오.
나는 그제야 몸을 돌려서 칠판을 보았소. 그리고 앞이 캄캄해짐을 깨닫는 동시에 뒤에서 아이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웃고 칠판에 쓰인 글을 노래하는 듯이 합창함을 들었소. 나는 그 순간에 교단 위에 쓰러지지 아니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오. 내 심장의 고동과 호흡은 분명히 정지가 되었었소. 내 수족과 등골에는 언제 어떻게 솟은 것인지 찬땀이 흘렀소. 세상에 이런 일도 있소? 그러한 지 거의 일 년을 지낸 오늘날이언마는 이 글을 쓸 때에도 내 심장의 고동과 호흡이 막힘을 깨닫소.
나는 아득아득하는 눈을 다시 떠서 칠판을 한 번 더 바라보았소. 그러나 칠판에 쓰인 글자는 아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뿐더러 내 눈의 관계인지 더욱 크게 보이오‒‒‒‒
「에로 校長崔皙, 에로女子高等師範學校南貞妊」
이렇게 써 놓은 것이요.
나는 번개같이 내 날이 온 것을 깨달았소. 나의 십오 년 간 교육자로의 생활의 끝날이 온 것을 깨달았소. 그리고 나는 그 칠판에 쓴 것을 지워 버릴 생각도 아니하고 출석부와 책과 분필갑을 들고 교실 밖으로 나왔소. 뒤에서 아이놈들이, 『에로 교장 만세! 만세! 만세!』하고 만세를 합창하고는 박장을 하고 발을 구르고 웃는 소리가 나오.


나는 그 중에 어느 소리가 어느 놈의 소리인지 분명히 알 수가 있었소. 내가 몸소 입학 구술 시험을 보아서 들이고 또 내 손으로 사 년 동안 가르친 아이들이 아니요?
그 한 놈, 한 놈을 내가 내 친자식과 같이 애지중지하던 것들이 아니요?
나는 교장실로 들어가기 전에 교무주임 K를 힐끗 보았소. 그는 전 교장 S라는 서양인이 늙어서 그만두고 귀국할 때에 나와 함께 교장 후보자가 되었던 사람이오. 그러다가 이사회에서 선거한 결과로 내가 당선이 되고, 그가 낙선이 된 것이요. 그는 본래 이 학교에 오래 있었고 나는 J 전문 학교의 교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었소. 형도 다 아시는 바이어니와 이 사람은 나 때문에 자기가 교장이 못 된 것을 원한으로 알고 항상 무슨 기회를 엿보던 판이 아니었소? 겉으로는 내게 대하여 부하로서의 충성과 친구로서의 우의를 꾸미나 나도 바보가 아닌 연에 그 사람 K의 심정을 노상 모를 리야 있소. 그렇지마는 일전에 순임이가, 「교무 선생님도 보셨답니다」하는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설마 이것을 가지고 나를 잡는 연장을 삼으리라고까지는 생각지못하였었소 도 나와 같이 교회의 . K 직분을 띤 사람이 아니요? 예배당에서는 성경을
강론하고 기도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아니요? 설마 그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소. 그러나 이 일은 K 교무주임의 음모에서 나온 것임을 나는 나중에 알았소.


그리고 K 교무주임은 지금은 소원 성취하여 내 뒤를 이어서 교장이 되었소.
나는 교장실에 들어가는 길로 사표를 써 놓고 K 교무주임을 불러서,
『심히 무책임한 일 같소이다마는 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사직하니 곧 선생이 이사회를 모으고 처리하시지요. 그때까지는 교장 사무를 선생이 보시지요.』하였소.
『웬 일이시오? 청천벽력으로 웬 일이시오? 교장이 사직을 하시면 학교는 어떻게 됩니까?』
하고 펄쩍 뛰던 그의 모양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아직까지도 K씨……지금은 교장이 나를 그렇게 아끼는지 한 번 물어 보고 싶소.
아무려나 이 모양으로 나는 교육가로서의 생활을 끝을 막음하였소.
그러나 형!
이것이 교육가로서의 생활의 끝만 되겠소? 내가 이번 일로 하여서 받은 타격은 내 명예와 자존심을 파괴해 버렸소. 나는 가정에서는 남편으로나 아비로나 완전히 위신을 잃어버렸고, 학교에서는 교장으로나 교사로나 완전히 큰 죄인이 되어 버렸소.


그 날 석간 모 신문에 「에로 교장」이라는 문구를 수없이 늘어놓은 기사가 났소. 내가 교장을 사직한 이면이라고 해서 내 아내의 입에서 나온 말과 거의 같으나 거기다가 살을 붙이고 문체를 돋친 기사가 난 것이요. 이 기사에 의하면 나는 본래 위선자요, 행실이 부정한 자였소. 형도 반드시 이 기사를 보고 놀랐으리라 믿소.
「학교 모 당국자 담」이라는 제목으로,
『최 교장이 사직한 것은 사실입니다. 글쎄 그것이 사실이라면 교육계의 큰
불상사입니다. 사람이란 외모로만 취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말이 그 신문 기사에 붙어 있었소. 이 모 당국자라는 것이 교무주임인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학생들을 선동해 놓고 내가 사표를 제출할 때에는 펄펄 뛰며 붙잡고, 그리고 신문 기사에 관해서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면서 외모로만 취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이 교무주임의 재주외다. 교장이 되리라고 이사회에서 말하면 그는 반드시 「천만에」하고 펄펄 뛸 것이지마는 이사회의 공기가 자기에게 불리할 것 같으면 반드시 또 어떠한 음모를 할 것이 눈에 보이오.


나는 보던 신문을 내던지고 최후의 결심을 하였소. 가정과 학교에서 쫓겨난 나 최석은 인제는 조선에서 쫓겨 나갈 프로그램에 다다른 것이요.
그러나 나는 도리어 태연하였소. 내가 어떻게 이 경우에 이렇게 태연하였을까. 지금 생각하면 몇 가지 이유가 있었소 . 첫째로는 하도 의외에 오는 큰 타격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큰 타격이니까‒‒‒이 큰 타격이 내 정신을 마비시킨 것이겠지요. 둘째로는 도무지 내 양심에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세째로는 아내, 자식, 동지, 동료, 세상의 믿을 수 없음에 낙망하여 에라 이런 놈의 가정이나 세상을 떠나 버리자‒‒‒‒시원하게 떠나 버리자 한 것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요.
나는 도무지 힘들게 생각하지도 아니하고 딱 결심을 하여 버렸소. 집을 떠나자, 조선을 떠나자, 그리고 아무쪼록 속히 이 세상을 떠나 버리자 하는 것이요. 나는 이렇게 결심을 하고 태연히 저녁상을 받고 아내더러 오늘 신문 석간을 보라고 하였소.
『여보!』
하고 나는 밥을 몇 숟가락 먹은 뒤에 뾰로통하고 앉았는 아내를 불렀소.
『웬 챙견이시우?』
하고 아내는 내가 예기하였던 바와 같이 톡 쏘았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늘 ○○ 신문 석간에 당신이 보면 퍽 좋아할 말이 났단 말요.』하고 나는 웃었소. 정말 유쾌하게 웃었소. 내가 아내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 유쾌하였단 말이오. 나는 아직 내가 교장을 사직한 것을 아내에게도 알리지 아니하였소. 알릴 사이도 없고 알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요.


물론 현재의 심리 상태로서 내가 보란다고 아내가 곧 신문을 볼 리가 없소. 내가 밥을 먹고 나간 뒤에야 볼 것이요. 그때까지는 아무리 호기심이 있더라도 아니 볼것이요. 미운 남편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골딱지가 난단 말이오.
내가 물 만 밥을 거의 다 먹은 때에 순임이년이,
『어머니!』
하고 문을 박차듯이 뛰어들어왔소. 내가 있는 것을 보고 주춤하였소. 순임의 손에는 내가 말한 석간이 들려 있었소. 나는 속으로 또 한 번 유쾌한 듯이 픽 웃었소.
『아버지 이 신문 보셨어요?』
하고 순임은 내 사진까지 난 신문을 내미오.
『그럼 안 봐? 그런 재미있는 기사를 놓칠 듯싶으냐. 너 어머니나 보여 드려라, 심심할 테니.』
하고 나는 바늘을 박은 독한 말을 하였소.
『어머니! 이를 어쩌우? 이걸 좀 보아요.』
하고 순임은 신문을 제 어머니 앞에 펴 놓고는 훌쩍훌쩍 울기를 시작하오.
순임이가 우는 것을 보니까 얼음같이 찬 웃음으로 찼던 내 가슴에는 뜨거운 무엇이 흐름을 깨달았소.
아내는 그 기사를 읽었소 . 나는 밥을 다 먹고 나서도 아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 이 기사가 내 아내에게 어떠한 반응을 주는가를 알고 싶어서 가만히 벽에 기대어 있었소.
아내는 그 기사를 다 읽고 나더니,


『아가 고소해라!』
하는 한 마디를 내던지고는 우는 순임을 보고,
『울기는 왜 우니? 왜 신문에서 없는 말을 썼니? 신문 기자가 날더러 물었더면 좀더 자세히 말을 해 줄 것을….』
하고 다음에는 나를 향하여,
『잘됐구려. 원래 교장 노릇을 하기가 잘못이지. 무슨 낯으로 뻔뻔스럽게 교장 노릇을 한단 말요? 애시 고만둘 게지. 흥 교육가. 인제 잘됐구려. 짓망신하고 인제야 더 망신할 나위 없으니 마음대로 정임이하구 사랑을 하든지 건넌방을 하든지 하시구려.』
하고는 잠간 쉬었다가,
『흥 모양 좋소. 인제 어디 낯을 들고 나가 댕긴단 말요 『아이 고소해라! 깨깨싸지.』하고 길게 한숨을 내어 쉬오.
순임은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건넌방으로 가 버렸소.
나도 아내의 이런 독한 말을 듣고도 조금도 노엽지도 아니하였소. 다만 순임이가 우는 것이 마음이 아플 뿐이었소.
나는 이날 밤에 거의 밤이 새도록 재산 목록을 만들고 유언을 썼소. 나는 내 재산을 오 등분하여 아내, 순임, 선임, 희, 정임 다섯 몫에 평균 분배할 것을 말하고 은행에 현금 예금 중에서 얼마를 찾아서 내가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마음대로 쓰기로 하였소.

이튿날 아침에 나는 이것으로 공정 증서를 만들어 원본을 내 집 금고에 넣고
등본 한 벌을 형에게로 보낸 것이요. 그리고 나는 온다간다 말없이 슬그머니 집을 떠나서 여의도 비행장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소. 비행기를 탄 것은 아무쪼록 남의 눈에 뜨이지 말자는 뜻이었소.
나는 처음은 만주 방면으로 달아나려고 하였소. 우리 조선 사람이란 달아난다면 곧 만주 방면을 연상하는 버릇이 있는 까닭이었소. 세상을 버리려고 가는 길에 방향이 있을 리가 있소?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나는 마지막으로 정임을 한 번 보아야 하겠어서 동경으로 향한 것이요.
푸루룩하는 프로펠러 소리에 한강, 서울 삼각산이 까맣게 안개 속으로 숨어 버리고 추풍령을 멀리 천여 미터 밑으로 내려다보는 새에 어느덧 울산에 다다라 잠간 쉬고 창파 묘망한 천 리 검은 바다 위에 날 때에는 벌써 내가 사랑하던 조선의 땅은 구름 밖에 숨어 버리고 말았소.
아아 다시 볼지 모르는 조선의 , 땅이여! 하고 나는 가슴이 아팠소마는 그런 생각도 순식간이요, 벌써 후쿠오까‒‒‒‒‒이 모양으로 이튿날 오후에 동경에 다다랐소.


정임의 병실 문을 두드리니 문을 여는 것은 정임이었소.
『웬 일이냐?』
하고 나는 깜짝 놀랐소.
『아이.』
하고 정임은 나 이상으로 놀라는 모양으로 뒤로 물러섰소. 정임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고 자줏빛 줄 있는 배드로움을 입고 발을 벗었소.
『지금 오는 길이다. 그런데 어느 새에 일어났느냐. 그래도 괜찮으냐. 간호부랑은 다 어디 갔니?』
하면서 정임의 모양을 훑어보았소.
수척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래도 병색은 좀 덜한 것 같았소.
『며칠째 제가 이렇게 기동을 하게 되어서 간호부는 돌려보냈어요. 오늘 선생께서 회진을 오시면 퇴원을 시켜달랄려고 했는데요.』
하고 정임은 제가 병이 나았다는 것을 실지로 보이려는 듯이 비틀거리지 않는 걸음으로 서너 걸음 걸어 보이고 내가 앉을 교의를 밀어 놓았소.
나는 정임이가 권하는 교의에 앉았소.
『그래 먹기는 무얼 먹니?』
『죽 먹는데, 죽에 물렸어요. 밥을 좀 먹고 싶은데 밥을 안 줍니다.』
하고 주저주저하면서 내 곁에 걸어와서 내가 앉은 교의에 한 손을 얹고 서오. 나는 정임의 일기에 「그이의 옷자락이라도 손끝이라도 스치고 싶은 걸 어찌하나」한 것을 생각하였소. 정임이 제야 내가 그 일기를 읽은 줄도 모르고 또 내 몸에 어떻게 큰 변화가 생긴 줄도 모르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정임은 내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견디다 못하여 물었소. 나는 내가 전번 정임을 보고 간 뒤에 일어난 모든 일이 어지럽게 생각이 나고 또 앞에 내가 나갈 일이 막연하게 보여서 말이 막혀서 우두커니 앉았던 것이요.
나는 가볍게,
『네가 어떤가 보려고 왔다.』
하고 무의식중에 길게 한숨을 쉬었소.
『학교도 쉬시고?』
하고 정임은 내 양복 깃을 만져서 접히는 것을 바로잡는 모양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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