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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유정, 3

by 핫PD 2011.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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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대학 병원 S 내과 X 호 병실이 정임의 병실이라는 것은 아까 키 큰 여학생
김에게서 들었소. 어쩌면 김이 나를 병원까지 안내해 주지 아니하였을까. 어쩌면 김의 태도가 그렇게 냉랭하였을까 하면서 나는 X호실을 찾았소. X호실이라는 것은 결핵 병실인 것을 발견하였소. 침침한 복도로 다니는 의사, 간호부들이 가제 마스크로 입과 코를 싸매고 다니는 것이 마치 죽음의 나라와 같았소. 어디나 마찬가지인 심술궂게 생긴 「쓰끼소이」노파들의 오락가락하는 양이 더구나 이 광경을 음산하게 하였소.


『남 정임은?』하고 나는 간호부실 앞에서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물었소. 병원에서는 간호부가 제일 세도 있는 벼슬인 줄을 알기 때문이오.
『X호실.』하고 뚱뚱한 간호부가 나를 힐끗 보며 냉담하게 대답하더니,
『남 정임 씨는 면회 사절입니다. 중증 환자로 절대 안정이니깐 면회는 못
하십니다.』하고 권위를 가지고 거절하였소.
『나는 남 정임의 보호자로서 병이란 전보를 받고 왔읍니다.』하고 나는 간호부의 태도에는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청하러 온 사람이라 더욱 공손하게 절을 하였소. 이렇게 어렵게 허락을 얻어 가지고 나는 X실이라는 병실에 들어갔소. 그것은 아마 무료 병실이나 아닌가 하리만큼 나쁜 병실이었소. 게다가 한 방에 칠팔인이나 환자가 누웠소. 나는 우리 정임을 이러한 병실에 입원시킨데 대하여서 굳세게 모욕감을 느꼈소.
간호부는 나보다 한 걸음 앞서 들어가서 정임의 침대 곁에 서며,
『난 상 오쿠니까라 멘카이닌(남 정임씨 본국서 손님 왔소).』하였소. 정임은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떴소. 그 눈은 내 눈과 마주쳤소. 수척해서 본래 좀 크던 눈이 더욱 커진 듯하였소. 그러나 그 얼굴은 더욱 옥같이 아름답고 맑아서 인간 세계의 사람 같지 아니하였소.


나는 하도 억해서,
『정임아 내가 왔다.』하고 담요 위로 정임의 가슴에 내 손을 대었소. 정임은 담요 밑에 있던 싸늘한 손을 꺼내어서 내 손을 잡고 말은 없이 눈물이 핑 돌았소.『하나시오 시데와 이께마셍(말을 하면 안 돼요)!』하고 간호부는 부하에게 호령하는 태도로 정임을 노려버렸소.
『응 말은 말아라.』하고 나는 간호부를 향하여,
『이야기 아니 시킬 테니 안심하시오. 고맙습니다.』하고 간호부에게 고개를 숙였소. 그제야 간호부는 나가 버렸소.
나는 정임의 침대 곁에 놓인 동그란 교의 위에 앉으며 베개 밑에 있는 가제를
접어서 정임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 주었소.
『정임아, 왜 우느냐? 마음을 든든히 먹어야지. 아무 염려 마라.』하고 나는 정임의 해쓱한 얼굴과 가늘어진 목을 들여다보았소. 그리고 베개 위에
흐트러진 검은 머리를 보았소. 그리고 다른 환자들을 돌아보고 목례를 하였소. 다들 동정하는 듯이 나를 보고 환자의 친족인 듯한 어떤 늙은 부인이,
『따님이세요? 저렇게 예쁜 이가 병이 나서‒‒‒‒‒ 아이 가엾어라.』하고 말을 붙이는 이도 있소. 내가 할 첫 일은 우선 방을 옮기는 것이었소. 소중한 정임이를 한 시각도 이런 하등 병실에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소.
『쓰끼소이는 안 달았니?』하고 나는 정임에게 물었소.
『하나 있는데 어디 나갔어요.』하고 정임은 들릴락말락한 음성으로 대답하오.


『병자를 혼자 두고 나가?』하고 나는 불쾌하였소.
나는 정임의 손을 들어 담요 속에 넣어 주고,
『내 얼른 댕겨 오마.』하고는 모자와 단장과 외투를 교의 위에 놓고 나갔소. 나는 의국을 찾아가서 S 박사를 만나려 하였으나 박사는 진찰 중이라 하기로 겨우 J라는 조교수 하나를 붙들고 사정을 말하고 혼자 있을 병실 하나를 달라고 하였소. 대단히 까다로운 여러 가지 교섭이 있은 후에 겨우 일등실 하나를 얻어 놓고 정임에게로 돌아와서,
『내가 조교수에게 말해서 병실을 하나 얻었다. 한 시간만 기다리면 옮겨 주마고. 여기서야 어디 병이 더하면 더하지 낫겠니? 또 조교수더러 물어 보니까, 네 병은 염려할 것은 없다고, 한 일주일 안정하면 괜찮을는지 모른다고. 그러나 몸이 대단히 쇠약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그러더라.』하여 정임을 위로하였소. 사실인즉, 조교수는 정임의 병에 대하여서 아직 분명한 진단도 얻지 못한 모양으로 말을 하였지마는 나는 이 경우에 정임에게 이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었소. 내가 온 것을 처음 보고는 정임도 퍽 흥분된 모양이어서 기침도 자주 하고 빨간 피를 두 번이나 뱉었으나, 차차 낯에 안심한 빛이 돌고 기쁜 빛까지 보였소. 약속한 시간보다 좀 더디게 오정 때나 되어서야 간호부가 환자 태우는 구루마를 끌고 들어와서 새 병실로 옮길 것을 말하였소.
간호부들이 정임을 안아서 구루마에 누이고 끌고 나간 뒤에 나는 정임의 담요와 세간을 정리하여 들고 여러 병자들께 인사를 하고 정임의 새 병실로 따라갔소. 이 병실은 이층으로 대학 정원을 바라보게 된 방인데 북향이지마는 넓고 깨끗하고 침대도 주석으로 되고 간호하는 사람이 잘 만한, 펴 놓으면 침대가 될 만한 걸상과 가족이 있을 만한 부실까지도 붙었소. 양복장, 테이블, 우단으로 싼 교의까지 있고 유리창에 커튼까지 있는 아주 훌륭한 방이오. 흠이라면 바닥에 깐 리놀륨이 좀 더러운 것일까.

침대에 깐 시트도 새롭고 희어서 얼룩이가 없었소.
이러한 병실에 정임을 갖다가 누이니 내 마음이 좀 편안하였소. 그리고 나는 간호부 하나를 구하여서 정임을 간호하게 하고 아침도 점심도 굶은 체로 오후 네 시나 지나서야 잠시 병원에서 나와서 병원 근처에 여관을 하나 정하였소. 집에다가 전보를 치고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그만 고꾸라져서 잠이 들어 버렸소. 하루 지나 이틀 지나 어느덧 사오일이 지났소. 나는 아침을 먹고는 병원에를 가서 정임을 보고 간호부에게 잠을 어떻게 잤나, 무엇을 얼마나 먹었나, 체온이 얼마, 또 피가 나왔나, 이런 것을 물어 보고 손수 정임의 이마도 만져 보고, 그리고는 J조교수를 찾아서 정임의 병세도 물어 보았소. J 조교수는 처음에 까다로운 사람 같더니 차차 사귀어서 나중에는 저녁을 같이 먹으러 다니리만큼 친하였소. 이 친구가
위스키를 좋아하고 댄스를 좋아하는 모양이나 나는 두 가지 다 못 하는 처지이므로 J조교수가 댄스를 할 때에는 나는 옆에 앉아서 구경을 하고, 그가 위스키를 먹을때에는 나는 탄산을 먹었소.
『한 잔 자시오!』하고 J 조교수는 농담 절반으로 내게 술을 권하고,
『자 한 번 추어 보아!』하고 나를 억지로 끌어내다가 여자를 껴안겨 주기도 하였소. 그도 내게 무관하게 된 모양이었소. 병원에서 하얀 진찰 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장히 까다롭고 빼는 편인 그도 진찰 옷을 벗고 이렇게 친구를 대하면 무척 천진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소. 이렇게 친하게 된 뒤로는 J 조교수는 무시로 정임의 병실에 나를 찾아왔소. 이것은 간호부들의 눈에 정임과 나와의 지위를 높여서 대우가 퍽 좋아졌소. 이런 조건들이 모두 합하여 정임의 용태가 퍽 좋아 가는 모양인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집에서 도무지 기별이 없는 것이요. 전보로 답장하라고 날마다 전보를 쳐도 한번도 회전이 없단 말이오. 회전이 없을 때에는 무사한 것은 분명하지마는 대단히 마음이 궁금하고 불쾌하였소. 그래서 나는 순임의 학교로 순임에게, 집 무사하냐 어머니 병환 『. 어떠시냐. 희도 잘 있느냐, 곧 전보해라. 네 피아노는 고르는 중이다. 정임은 그만하다. 아비.』하는 의미의 전보를 놓았소. 피아노 말을 해야 순임이가 곧 답장할 줄을 알았기 때문에 특별히 피아노란 말을 썼소.


그리하였더니 아니나다를까 그날로,
『집은 무사하다. 어머니는 성이 나서 운다. 어서 오너라. 희도 감기들었다. 피아노 고맙다. 순임.』하는 답전이 왔소.
집에서 도무지 답전이 없길래 나도 대개는 짐작하였소. 내 아내가 화를 내어서 일부러 회답을 아니 하는 것이 분명하였소. 나는 딸에게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전보를 받는 길로 곧 은좌(銀座) 방면으로 나가서 피아노를 돌아보았소. 그리고 일천 칠백원짜리 하나를 값을 해서 수송하기를 청하고 약속금 오백원을 치렀소. 이 피아노가 만일 내 딸 순임을 매수하기에 성공한다면 내 생활은 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 돈 일천 칠백원은 아까운 돈이 아닌 것 같았소. 정임의 병도 그만하고 J 조교수의 말도 대단치는 아니하리라 하기로 정임에게는 퇴원하게 되는 대로 J 조교수의 말을 따라서 어느 요양원으로 가든지 조선으로 오든지 하라고 일러 놓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려고 내일이면 떠난다고 마음을 먹고 자리에 들었소.
잠이 들어서 몇 시간이나 되었던지 나는 전화 소리에 잠이 깨었소.
『하가 하이(네 네).』하고 전화 수화기를 떼어 든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소. 그것은 분명히 정임을 보아주는 간호부의 음성으로,
『남 정임 씨가 병이 중하십니다. 곧 들어오십시오.』하는 전화였소.
아까까지 괜찮던 정임이가 웬 일인가 하고 나는 시계를 보았소. 어느 새에 새벽 다섯시. 나는 옷을 주워입고 병원으로 달려갔소. 간호부실에 들러서,
『남 정임이가 병이 더쳤어요?』하고 물었소.


『네, 밤에 각혈을 많이 하셔서 퍽 중하십니다. 아이 참, 걱정되시겠습니다. 지금 바로 숙직하시는 선생께서 다녀가셨습니다.』하고 인제는 낯이 익은 간호부는 친절히 대답해 줍니다. 나는 정임의 병실로 가서 가만히 문을 열었습니다. 방에는 아직도 간호부 하나가 남아서 한 손에 시계를 들고 한 손으로 정임의 맥을 짚고 있고, 테이블 위에는 주사를 하였는 듯한 제구가 어수선히 놓였소. 나는 눈을 감고 누웠는, 희미한 전등빛에 비추인 정임의 얼굴을 잠간 보고, 그리고 K라는 전속 간호부에게로 가서 자세한 말을 물어 볼 양으로 정임의 침대머리를 지나다가 유리 타구가 철철 넘는 빨간 것을 보았소. 그것은 이백 그람 컵으로 셋은 될 것이요! K 간호부는 내 귀에 입을 대고,
『어젯밤 당신(나를 가리키는 말)께서 가신 뒤에 난 상(정임)이 자꾸만 우셔요. 우시면 병에 좋지 않다고 암만 말씀해도 자꾸만 우시는구먼요. 그러시더니 제가 잠간 잠이 들었는데 난 상이 저를 부르시길래 보니깐 글쎄 저렇게 피를 쏟으셨구먼요.』하는 꼴이 우는 정임을 혼자 두고 간호부는 잠이 들어서 쿨쿨 오륙시간이나 자다가 정임이가 피를 많이 토할 때에야 비로소 깬 모양이었소. 괘씸한 년 같으니! 하고 나는 K 간호부를 한 번 노려보았소.
맥 보던 간호부가 나간 뒤에 나는 정임의 맥을 가만히 짚어 보았소. 맥이
끊어지지나 아니하였나 하다시피 약하오. 정임의 입술에도 붉은빛이 줄었소. 정임은 아마 혼수 상태인 것 같았소. 나는 가만히 정임의 손을 놓고 정임의 잠을 깨우지 아니할 양으로 가만가만히 방 한편 구석으로 물러나와서 죽은 듯한 정임을 바라보고 있었소.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따뜻한 사랑도 없는 남의 집에 얹혀서 눈칫밥으로 자라난 정임, 천상 천하에 의지할 곳 없고 알아 주는 이 없는 정임, 저것이 인제 죽어버린다면! 하고 생각하면 뼈가 저리게 불쌍하였소. 내가 온 뒤에도 웬 놈팡이들한테서 편지도 몇 장 오고, 선물도 몇 가지 들어왔으나 그 편지 사연을 보더라도 다들 제 편에서 외짝 사랑이었고 정임이 편에서는 도무지 응하지 아니하였던 것이 분명하오.


『너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있니?』하고 어느 날 내가 물을 때에 정임은,
『없읍니다.』하고 적막하게 웃었소. 정임은 거짓말할 애가 아님을 나는 믿소. 이 세상에 왔다가 얼음같이 찬 속에서만 살고 부모의 정, 형제의 정, 애인의 정, 부부의 정도 하나도 맛보지 못하고 죽어 가는 정임의 정경을 생각해 보시오. 내가 통곡할 생각이 났겠소? 아니 났겠소! 이에 나는 결심하였소‒‒‒‒ 아무리 해서라도 정임은 살려내야 된다고. 그리고 나는 간호부실에 달려가서 J 조교수 집으로 전화를 걸었소. 아직 오전 여섯시, 이때는 밤에 늦도록 댄스요 위스키요 하고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는 J 조교수는 아직 곤하게 잘 때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소. 그러나 정임의 생명에 관한 일이 아니요?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서 미안합니다 『. 그 애의 병이 대단하니 내가 지금 댁으로 선생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어떠하신 일이 있으시더라도 지금 꼭 와
주셔야겠습니다.』하고 열렬하게 들이대었소. 그랬더니 원체 나하고는 사귄 터이라,
『다리러 오실 것 있소? 내 곧 가리다.』하고 선선하게 대답합디다.
과연 삼십 분 내에 J 조교수가 달려왔소. 그는 진찰복도 입지 아니하고 모자도 쓴 채로 바로 병실로 들어왔소. 그렇더라도 간호부실에서 정임의 용태는 물어 가지고 왔을 것은 분명하오. J 조교수는 외투도 입은 채로 정임의 맥을 짚어 보고 그리고는 청진기를 내어서 정임의 가슴을 보았소. 그리고 눈을 보고 손톱도 보고 의사가 보는 것을 다 보고 나서는 정임의 정신없는 얼굴을 이윽히 보고 섰더니 자기가 먼저 방에서 나가면서 날더러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오. 나는 불안을 가지고 따라갔소. J 박사는 긴 복도로 꼬불꼬불 한참이나 걸어가서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가 모자와 외투를 벗어 던지고 앉으며 나에게도 자리를 권하오.


『쩟, 걱정이오.』하는 것이 J 박사의 첫 말이었소.
『죽을까요?』하고 나는 눈을 크게 떴소.
『죽기야‒‒‒‒‒. 생명에는 신비력이 있으니까, 꼭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사는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꼭 살아나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죽는 수도 있고‒‒‒‒‒. 생명에 신비력이 있읍니다.』하고 그는 잠간 말을 끊었다가,
『원체 쇠약한데다가 피를 많이 잃고, 가슴에는 라셀이 가득 찼단 말이오. 그것도 또 걷히려 들면 며칠 안 해서 걷히는 수가 있읍니다. 생명의 신비라는 것이지요.』하고 담배를 내뿜으면서 휘 한숨을 쉬었소.
나는 다만 조교수의 처분만 바라는 사람 모양으로 잠자코 그의 하는 양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소. 내 신경과 근육은 모두 굳어져서 움직이려도 움직일 수 없는 것만 같았소.
『글쎄‒‒‒‒요.』하고 J 조교수는 내가 속으로 생각한 것을 알아듣는 듯이,
『글쎄. 수혈이나 한 번 해 볼까.』하고 나를 바라본다.
『수혈이라니요?』
『다른 사람의 피를 병자의 정맥에 넣는 것이지요.』
『수혈을 하면 살아날까요?』
『피가 부족하니까. 또 수혈을 하면 출혈이 그치는 수가 있으니까.』
『그러면 내가 피를 주지요!』하고 나는 내 피를 정임을 살려내기에 바치는 것이 기뻤소.


『아무의 피나 함부로 넣는 것이 아니니까 피를 검사해 보아야지요.』하고 J 박사는 내가 허둥지둥하는 태도가 우스운 듯이 빙그레 웃으며,
『피는 사려면 얼마든지 파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럼 수혈을 해 봅시다.』
하고 J 조교수는 전화 앞으로 가오.
J 조교수는 먼저 정임의 귀의 피를 뽑아 혈형을 검사한 결과,
『누르로군.』하고 나더니,
『누르 형을 가진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피를 줄 수는 있지마는 같은 형을 가진 사람의 피가 아니고는 받을 수는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늘 주는 편이야.』하고 다음에는 내 피를 검사한 결과 J 박사는,
『오오케이. 노형의 피가 다행히 누르요. 혈형은 맞는데.』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노형은 화류병은 없으시오.』
『없지요!』
『그렇게 자신이 있으시오? 만일 의심이 있거든 검사를 하게…….』
『절대로 없지요.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하고 나는 단언하였소.
『그러면 좋소이다. 그러면 노형의 피를 얻기로 합시다.』하고 J 조교수는 간호부에게 수혈 준비를 명하였소. J 조교수는 내 왼쪽 팔의 굽히는 곳의 정맥에서 피를 뽑아 정임의 왼편 팔의 정맥에 넣는 일을 하였소. 나는 유리통에 뽑혀 나오는 검붉은 내 피를 보았소. 그것이 정임의 혈관으로 다 들어가 버리는 것을 보았소. 그리고 나는 잠간 아뜩함을 깨달았소. 사백그램이라면 두 컵의 피를 뽑아낸 셈이오. 한 십 분 동안이나 가만히 누워 있으니까 정신이 평정함을 깨달았소. 나는 내 피가 정임에게 들어가 어떠한 작용을 하는가 알고
싶었소. 참으로 신기한 일이요. 수혈이 끝난 지 삼십 분이 못 하여서 정임의 두 뺨에는 붉은 기운이 돌고 죽은 듯하던 입술에도 제 빛이 돌아오지 않겠소.


나는 너무도 기뻐서,

『정임아!』하고 불러 보았소.
정임은 내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소. 정임은 살아났소.
『신효하지요?』하고 J 조교수는 빙그레 웃었소. 그때에서 그는 간호부가 준비한 물에 손을 씻었소.
그는 하얀 타월로 손을 씻으면서,
『수혈도 효력이 날 때도 있고 아니 날 때도 있지마는 효력이 나게 되면 그야말로 쇳소리가 나는 것이요. 노형도 오늘은 피를 많이 잃었으니 좀 안정을 하시는 것이 좋겠소이다.』하고 나가 버렸소.
나는 J 조교수의 말대로 비워 둔 부실의 침대 위에 쉬기로 하였소. 약간
어찔어찔하고 메슥메슥함을 깨달았소. 내 피가 힘을 발하였는지 모르거니와 정임의 병세는 이삼 일 내로 훨씬 좋아져서 J 박사도,
『랏셀도 훨씬 줄었고, 맥도 좋고, 신열도 없고 괜찮을 모양이오.』
하고 안심할 확신 있는 말을 하여 주었소.
나는 더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정임을 J 조교수에게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소.
형이여!
그랬더니 말이오. 집으로 돌아왔더니 말이오!
내 아내는 나를 보고 미친 듯이,
『왜 왔소?무엇 하러 왔소. 그년하고 살지. 왜 왔소?』하고 몸부림을 하고 야단이오.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소.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럼 정임이가 병이 중하다는데 내가 안 가본단 말요?』하고 나는 부드럽게 말하였소.
『흥, 말은 좋지. 정임이가 무슨 병이야? 병이 무슨 병이더냐 말야?』
하고 아내는 더욱 미쳐 뛰오.
『무슨 병? 각혈을 했단 말요. 목구멍에서 피가 나왔어. 각혈을 두 번이나 크게해서 죽을 뻔했는데 면사나 되었으니 다행 아니요?』하고 나는 더욱 부드럽게 말하였소.


『흥, 각혈? 흥, 각혈? 뻔뻔스럽게 나를 속여 보려고. 낙태를 시키다가 피를
쏟았다더구먼, 왜 내가 모르는 줄 알고. 흥, 지난 여름에 나왔을 적에‒‒‒‒아이구 분해.
아이고 분해. 내가 어리석은 년이 되어서 감쪽같이 속았네에‒‒‒‒‒. 그런들 설마 제 딸 동갑인 계집애를 건드리랴 했지. 엑 이 짐승 같은 것. 그러고도 교육가. 흥, 교장. 아이구 분해라.』이 모양으로 온 동네가 다 들어라 하고 외치는구료. 여보 이거 미쳤소 글쎄 『, ? 그게 웬 소리요? 뉘게 무슨 말을 듣고 그런 종작없는 소리를 한단 말요? 원 이거 하인들이 부끄럽고 동네가 부끄럽지 않소? 원 말이 되는 말을 가지고 그래야지.』하고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방바닥에 펄썩 주저앉아 버렸소.
『좀 뵈어 주까요? 그럼 증거를 좀 뵈어 주까요? 자 이거를 좀 보시오!』하고 아내는 어떤 일기책 하나를 장 서랍에서 꺼내어서 내 앞에 픽 던지오. 나는 배밀이로 엎어진 일기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겨보았소. 그것은 정임의
일기책이었소. 나는 이 일기책을 온통으로 형에게 보내어 드리고 싶소마는 그리할 수가 없소. 왜 그러냐고? 나는 정임의 물건으로 이것밖에 가진 것이 없소. 나는 이것을 유일한 정임의 기념으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날까지는 몸에 지니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소. 그러다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나는 이 일기를 불에 살라 버리거나 땅에 묻어 버리고 떠나려오.
그러므로 나는 이 일기를 지금 형에게 보내어 드릴 수는 없고 그 중에서 이 편지에 도움이 될 만한 몇 구절을 베껴 보내오‒‒‒‒‒
『오늘이 새해. 오늘부터 내 나이가 二十三. C 선생은 몇 살이 되시나. 지난 여름에 뵈올 때에는 벌써 얼굴에 몇 줄기 주름이 있던데. 아! 어머니 돌아가신 지가 벌써 십오 년. 이 외로운 아이는 오직, 오직 C 선생님의 사랑의 품에서 살았다. 나는, 나는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나. 이 몸과 마음을 C 선생님께 다 바치기로니 그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일기 첫 장인 정월 초하룻날 것이었소.


『아 웬 일인가. 나는 왜 이렇게 외로울까. 나는 무한한 허공에 뜬 외로운 별 하나. 아아 그 허공의 참이여! 어둠이여! 차고 어두운 허공으로 지향 없이 흘러가는 외로운 작은 별이여!』이러한 극히 적막한 서정시 같은 것도 있고 또 어떤 날에는,
『아아 나는 죽어 버릴까. 사랑하는 그이도 내 손이 아니 닿는 하늘 위의 별.』이러한 절망적인 말을 쓴 것도 있소.
정임의 일기에는 어디나 그 적막하고, 거의 절망적이라고 할 만한 슬픔이 흐르오. 그가 「그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를 가리킴인가. C 선생이라고 한 것은 무론 내 성 최의 머릿자겠지마는 그의 일기에는 C 선생이라는 말과 「그이」라는 말이 날마다 쓰여 있소.
『아마 나는 죽을까보아. 이대도록 괴롭고도 살 수가 있나. 오늘은 교실에 들어가 앉았어도 무엇을 배웠는지 정신이 없이 있다가 동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동무들은 어찌 그리 행복된가. 그들에게는 부모가 있어서 그러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한가. 나는 그들과 같이 유쾌하게 살지를 못하는가.』
『나는 암만해도 죽을 것만 같다. 이렇게 괴롭고도 살 수가 있나.
괴로울수록 그이가 그리워. 그이 곁에 있으면 내 눈에도 웃음이 있을 것 같다. 낸들 웃을 줄을 모르나, 기뻐할 줄을 잊었나. 그이 곁에만 있으면 나는 춤이라도 출 것 같다.』
『아아 그이를 떠나 있는 슬픔이여! 외로움이여! 내 타는 마음을 그이에게 통하지도 못하는 슬픔이여, 외로움이여! 아무리 하여도 그이는 손이 안 닿는 하늘의 별인가. 나는 닿지 못할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다가 죽어 버릴 것인가.』이러한 구절도 있고, 또 여름 방학이 가까운 유월에 들어가서는 더욱 열렬하게 되어,


『나는 이번 방학에 가면 그이에게 내 생각을 다 말해 버릴 테야. 이년! 하고
책망을 받으면 어떤가. 종아리를 맞으면 어떤가. 아무리 무서운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이번 방학에 가면 그이에게 내 가슴 속에 뭉친 불덩어리를 내던질 테야. 그리고 미친듯이 대들어서 그이의 목에 매달릴 테야. 그렇게나 아니하고야 어떻게 내가 그이에게 내 속을 보여 보나.』
『아아 사랑하지 못할 이를 사랑하는 내 아픔이여! 차라리 나를 죽일까.』
이러한 곳도 있고,
『나는 오늘 C 선생께 내 속을 말하는 편지를 썼다가 불에 살라 버렸다. 이렇기를 모두 몇 십 번이나 하였던고?』
『C 선생은 내 아버지가 아니냐. 아아 나는 왜 그이를 아버지라고 못 부르는가. 왜 C 선생을 내가 그이라고 부르는가. 내가 죄다! 죄다! 다시는 C 선생을 그이라고 아니 부르고 아빠라고 부를란다. 하나님이시여, 딸아기가 아빠를 그리워하는 것도 죄가 되오리까. 죄가 된다고 하여도 무가내하입니다.』
이런 말이 있소. 이런 말을 보면 C 선생이란 것이나 그이란 것이나 아빠란 것이나가 다 나를 가리킨 듯도 하였소. 내가 이것을 발견할 때에 어떻게나 놀랐겠소.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임은 분명히 내게 대하여 일종의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요. 내 아내가 정임이가 열여섯 살 적에 「흥 어린애!」하던 것이 생각나오. 역시 아내가 나보다 정임의 속을 잘 알았던 것이요. 그러면 정임이가 나에게 대하여 한 이성으로의 사랑을 느끼는가 하고 나는 한참이나 숨을 못 쉬도록 놀랐소. 그러나 그 다음 일기를 볼 때에 놀란 것에 비기면 이런 것은 다 우스운 일이요.


『내일은 서울로 간다. 그 어른의 곁으로 간다. 한 달 동안 그 어른의 곁에 나는 있는다. 한 달 동안에 설마 그 어른의 손끝 한 번이야 못 스쳐보랴. 비록 그의 품에 안겨 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인제는 ( 나는 어린애가 아니니깐) 그의 옷자락에야 한두번 못 스쳐보랴. 나는 그때에 있을 기쁨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내 아빠. 이 외로운 딸은 아빠의 곁을 향하고 갑니다. 저의 손을 잡아 주세요. 예전 북경서 저를 데리고 오실 때 모양으로 차에 저를 안아 올려 주셔요. 머리를 쓸어 주시고 뺨을 만져 주세요. 지금은 왜 못 하셔요? 왜 못 하실 이유가 있읍니까?』
인제는 분명히 정임이가 「그이」라고 한 것이 내인 줄을 알았소.
정임이는 방학에 내 집에 온 첫날 일을 기록하되,
『아아 내가 무엇 하러 서울을 왔던고? 누구를 보러 왔던고? 순임 어머니와 순임은 어찌 그렇게도 냉랭하고, C 선생께서도 어찌 그리도 본체만체하시는고. 아아, 이 얼음가루가 날리는 곳을 나는 무엇 하러 왔던고.』
나는 미아리 어머니 무덤에 가서 두 시간이나 울고 왔다. 울면 쓸데 있나. 어머니는 벌써 다 썩어 없어지신 것을. 아아, 나는 어디 가서 울꼬? 울려고 해도 울 곳도 없구나.』이러한 곳이 있고, 또 어떤 날에는,
『학교에를 가니 방학이 되어서 동무도 선생도 다 없다. 미친 사람 모양으로 교실로 잔디판으로 나무 그늘로 기웃거리다가 혹시나 그이를 만날까 하고 그이가 댕김직한 길로 해가 지도록 쏘다녔다.
집에 돌아오니 그이가 계시지마는 한 집에 계실수록 동경서 생각할 때보다 천 리 만리나 더 떨어진 것 같다. 나는 동경으로 도로 갈까봐.』
이러한 곳도 있고,
『C 선생님이 가족을 데리시고 원산으로 가신다고 나도 같이 가자고. 원산이나 가면 C 선생님께 조용히 말씀할 기회나 얻을까. 몸이 불편하다. 병이 나려나


이 밖에도 정임은 그 일기에 감상적이요, 열성적인 슬픔을 많이 적는 동안에 이러한 기록이 있소.
『내일은 원산을 떠난다. 아아 그리도 외롭던 원산이여! 슬프던 원산이여! 그러나 나는 원산을 축복한다. 원산은 나에게 그이와 함께 하는 하룻밤을 주었다. 캄캄하게 어두운 밤, 바람에 구름은 뭉게뭉게 하늘과 바다 가 모두 열정으로 끓는 밤에 나는 그이와 단둘이 있는 하룻밤을 가졌다. 비록 그것이 한 시간도 못 되는 아마 반 시간도 못 되는 짧은 동안이었으나 그 동안만은 그이는 완전히 내 것이었다. 아아 일생에 잊히지 못할 그 시간. 내가 세상에 난 것이 그 한 시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알았다. 겉으로는 냉정한 듯한 그이의 마음에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열정이 있음을. 나는 인제 죽어도 좋지 아니한가.』이러한 소리가 적혀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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