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재방송/기타/E북&오디오북

이광수-유정, 5

by 핫PD 2011. 10. 29.
728x170


『학교는 사직해 버렸다.』
『네에? 왜요?』하고 정임은 교의에 얹었던 손을 떼어 가지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오.
『다른 일을 좀 해볼 양으로.』
『네에.』하고 정임은 더 파서 묻기가 미안한 모양이나 그 눈에는 의심과 불안이 꽉 찬 것이 분명하였소. 그러나 나는 지금 정임의 마음을 괴롭게 할 말을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을 생각하였소. 그러나 정임에게 가장 놀랍지 아니하게 가장 정임이가 받을 타격의 분량이 적도록 그 동안 일어난 사정을 말하지 아니치 못할 필요도 있는 것은 사실이오. 그 일은 정임에게도 관계가 되는 일이니까.
『나는 어디 여행을 좀 하고 올란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너를 한 번 더 보고
가려고 왔다. 몸도 성하지 못한 것을 혼자 두고 가서 안 되었지마는 내가 있대야 별수 없고 네 치료비는 P 선생에게 맡기고 가니 아무 때에나 필요하거든 찾아 써라.


절약해 쓰면 네가 일생이라도 먹고 살 만하니 돈 걱정은 말고 부디 몸조심해서 공부를 잘해라. 네가 호흡기가 약하니까 학교를 졸업하더라도 교사 노릇할 생각은 말고 혼인하기까지에는 너 혼자서 네 마음대로 책이나 보고 너 하고 싶은 일을 하여라. 내가 너를 여덟 살부터 길렀으니 의로나 정으로나 내 친딸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뿐더러 부모도 안 계시고 몸도 약하니 내가 순임이를 생각하는 것보다 너를 더 가엾게 생각한다. 내 생각 같아서는 너를 늘 내 곁에 두고 싶건마는 어디 사정이 그리 되느냐. 그러니 너는 내 집에 올 생각도 말고 너 혼자 네 길을 개척하여라. 나는 네가 범상한 아이가 아닌 것을 믿는다. 너는 반드시 남 못 한 일을 할 아인 줄을 믿는다. 그러니까 부디 몸을 조심해서‒‒‒‒‒부디 주의해서 세상이 너를 향하여 무슨 말을 할지라도 무슨 참을 수 없는 말을 할지라도 도무지 괴로워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태연하게 나가거라. 너는 내 크나큰 희망 중에 하나다. 부디 내 말을 허술히 알지 말고, 알아들었니?』이 모양으로 말을 하였소. 여행 중에 준비하여서 아주 냉정하게 말하려던 것이 정작 정임을 대해서 이 말을 하게 되니 점점 흥분이 되어서 말이 떨리고 눈물이 끓어오름을 깨달았소.


고개를 숙이고 서서 듣던 정임은 울기 시작하였소. 그는 울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이었으나 몸이 흔들리고 눈물이 쏟아졌소.
나는 아뿔싸 이거 안 되었구나 하고 벌떡 일어나서 정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아가 울지 마라, 울면 병이 더친다. 자, 가 드러누워라. 내 여관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오마. 어서 울지 말고 가 드러누워!』하고 정임을 침대 곁으로 밀었소. 그랬더니 정임은 열정에 견디지 못하는 듯이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더욱 느껴 우오.
『얘! 울지 말어!』하고 나는 아비의 위엄으로 소리를 질렀소. 그리고 정임의 어깨를 잡아서 몸에서 떼어밀었소.
정임은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소리로,
『저를 딸이라고 불러 주셔요!』하고는 또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몸을 내게 기대었소.
『오냐, 네가 내 딸이다. 내가 네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네 아버지다. 정임아, 네가 내 딸이다!』하고 나는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면서 정임의 등을 한 번 만져 주었소.
그리고,
『정임아 인제 울지 말고 드러누워서 안정해라.』하고 나는 정임을 억지로 떠밀어다가 침대에 누이고 담요를 덮어 주고 눈물을 씻어 주고, 그리고는,
『그런데 이 간호부는 어디 갔단 말이냐? 오, 내보냈다지 ? 그럼 쓰끼소이는 어디 갔단 말이냐?』하고 교의에 돌아와 앉았소.


정임은 대답이 없고 다만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울기만 하였소.
이때에 간호부가 저녁 검온을 하러 들어왔소.
나는 일어나서 공손하게 인사하고 정임이가 신세진 치하를 하였소.
『속히 나으셔서 기쁘시겠습니다.』하고 간호부는 답례를 하고 정임의 곁으로 가서,
『난상(남선생), 주무시오? 우시오? 이케마셍요(좋지 않습니다).』하고 검온기를 정임의 배에 놓고 나가 버리오. 나는 병원에서 어떤 모양으로 여관에 돌아왔는지 모르오. 어디서 어떻게 택시를 주워 타고 어떻게 호텔 문을 들어와서 층층대를 올라왔는지 모르오. 어떻게 보이에게 키를 달래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왔는지 모르오. 정임의 앞에서 억제하였던 모든 감정이 병원 문을 나서면서 폭발이 된 것이요. 방에 들어와 앉아서 나는 불을 켤 생각도 아니 하고 저녁을 먹을 생각도 아니 하고 취한 사람 모양으로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언제까지든지 몸도 꼼짝 아니 하고 앉아 있었소. 밖에서는 비가 오는 모양이오. 전차와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서 우는 소리 모양으로 들리오. 나는 교의에서 벌떡 일어나며, 가자 내일 아침에 떠나자 『. . 정임에게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가 버리고 말자.』하고 혼자 중얼거렸소.


그리고 식당에 가서 요기를 하고는 로비에 앉아서 사람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소.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외투에 물방울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니 상당히 비가 오는 모양이오. 로비 한편 구석 테이블 앞에 어떤 인도 사람인 듯한 이 하나가 혼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그렇게도 고요하게, 그렇게도 애수의 빛을 띠고, 다른 아리안족들은 모두 혹은 동족 여자와, 혹은 일본 여자와 유쾌하게 기운 있게 환담을 하는데 인도인 신사 한 분만이 그렇게도 적막하게 앉았소.
내가 내일 이 곳을 떠나면 어디로 갈는지 모르거니와 내 앞에 닥칠 내 신세가 꼭 저 인도인의 신세와 같을 것 같았소.
영국인, 미국인‒‒‒‒그 호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을 붙일 생각이 없었으나 나는 이 인도인 신사와는 말을 붙여 보고 싶었소. 그는 나와는 퍽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소. 처음 보지마는 정다운 것 같았소.
그러나 내 가슴에 사무친 한량없는 근심은 이 인도인 신사에게 말을 붙일 여유를 주지 아니하였소. 아까 병원에서 정임이가 울고 내 가슴에 안기던 모양이 눈앞에 번쩍하면 내 심장은 형언할 수 없는 격렬함과 불규칙함을 가지고 뛰었소. 쾅쾅쾅쾅 하는 절망적이요 어지러운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하였소. 나는 이층인 내 방으로 올라왔소. 나는 내 마음의 평정을 억지로 회복할 양으로 활활 옷을 벗고 목욕을 하고 그리고 자리옷을 갈아입고 그리고는 불을 끄고 침대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나는 잔다.』하고 스스로 소리를 질렀소.


나는 몇 번이나 등을 켰다가는 끄고, 켰다가는 끄고 하다가 마침내 벌떡 일어났소.
나는 편지지를 내어놓고,
『사랑하는 딸 정임아.』하고 썼다가는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온당치 아니한 듯하여 찢어 버리고,
『내 딸 정임아.』하고 썼다가는 「내」라는 말이 불온하다 하여 찢어 버리고, 마침내,
『딸 정임아!
나는 간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나는 간다.
나는 조선을 버리고 내가 지금까지 위해서 살고, 속에서 살고, 더불어 살던 모든 것을 떠나서 나는 지향 없이 간다.
내 딸아!
나는 네 일기를 보았다 네가 나를 . 얼마나 사모해 주는지를 잘 알았다. 그리고 아까 네가 울면서 내 가슴에 안기던 정을 내가 안다. 부모도 없는 너, 외로운 너, 병든 너의 그 형언할 수 없는 적막을 내가 안다. 그러나 정임아, 나는 네 사모함을 받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네가 나를 사모하느니만큼 나도 너를.』하고 그 다음 말을 무엇이라고 쓸까 하고 붓을 정지하였소.
『나도 너를 사모.』라는 것은 무론 말이 아니 되고,
『나는 너를 사랑.』이라고 하면? 하고 나는,
『아니! 아니!』하고 힘있게 몸을 흔들었소.


나는 「사랑」이란 말에 이르러서 힘있게 몸을 흔들고는 붓대를 내던지고 황송한 망상을 떨어버리려고 문을 열고 루프로 나갔소. 한참이나 인적 없는 루우프로 거닐다가 빗방울이 내 뜨거운 뺨을 치는 것을 깨달았소. 동풍인지 북풍인지 모르나 바람이 부오. 입김 모양으로 훅 불고는 그치고, 그럴 때마다 빗발이 가로 뿌리오. 긴자의 네온사인 빛이 파우스트에 나오는 요귀의 불빛 모양으로 푸르무레하게 허공을 비추오. 동경의 불바다는 내 마음을 더욱 음침하게 하였소. 이때에 뒤에서,
『모시모시(여보세요).』하는 소리가 들렸소. 그것은 흰 저고리를 입은 호텔 보이였소.
『왜?』하고 나는 고개만 돌렸소.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하고 나는 보이에게로 한 걸음 가까이 갔소. 나를 찾을 손님이 어디 있나 하고 나는 놀란 것이요.
『따님께서 오셨습니다. 방으로 모셨습니다.』하고 보이는 들어가 버리고 말았소.
『따님?』하고 나는 더욱 놀랐소. 순임이가 서울서 나를 따라왔나? 그것은 안 될 말이오. 순임이가 내 뒤를 따라 떠났더라도 아무리 빨리 와도 내일이 아니면 못 왔을 것이요. 그러면 누군가. 정임인가. 정임이가 병원에서 뛰어온 것인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하면서 내 방문을 열었소.
그것은 정임이었소 정임은 내가 . 쓰다가 둔 편지를 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들어 안겨 버렸소. 나는 얼빠진 듯이 정임이가 하라는 대로 내버려두었소. 그 편지는 부치려고 쓴 것도 아닌데 그 편지를 정임이가 본 것이 안되었다고 생각하였소.


형! 나를 책망하시오. 심히 부끄러운 말이지마는 나는 정임을 힘껏 껴안아 주고 싶었소. 나는 몇 번이나 정임의 등을 굽어보면서 내 팔에 힘을 넣으려고 하였소. 정임은 심히 귀여웠소. 정임이가 그처럼 나를 사모하는 것이 심히 기뻤소. 나는 감정이 재우쳐서 눈이 안 보이고 정신이 몽롱하여짐을 깨달았소. 나는 아프고 쓰린 듯한 기쁨을 깨달았소. 영어로 엑스터시라든지, 한문으로 무아(無我)의 경지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하였소. 나는 사십 평생에 이러한 경험을 처음 한 것이요.
형! 형이 아시다시피 나는 내 아내 이외에 젊은 여성에게 이렇게 안겨 본 일이 없소. 무론 안아 본 일도 없소.
그러나 형! 나는 나를 눌렀소. 내 타오르는 애욕을 차디찬 이지의 입김으로 불어서 끄려고 애를 썼소.
『글쎄 웬일이냐. 앓는 것이 이 밤중에 비를 맞고 왜 나온단 말이냐. 철없는 것 같으니.』하고 나는 아버지의 위엄으로 정임의 두 어깨를 붙들어 「암체어」에 앉혔소. 그리고 나도 테이블을 하나 세워 두고 맞은편에 앉았소.
정임은 부끄러운 듯이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제 무릎에 엎드려 울기를 시작하오. 정임은 누런 갈색의 외투를 입었소. 무엇을 타고 왔는지 모르지마는 구두에는 꽤 많이 물이 묻고 모자에는 빗방울 얼러지가 보이오.
『네가 이러다가 다시 병이 더치면 어찌한단 말이냐. 아이가 왜 그렇게 철이
없니?』하고 나는 더욱 냉정한 어조로 책망하고 데스크 위에 놓인 내 편지 초를 집어 박박 찢어 버렸소. 종이 찢는 소리에 정임은 잠간 고개를 들어서 처음에는 내 손을 보고 다음에는 내 얼굴을 보았소. 그러나 나는 모르는 체하고 도로 교의에 돌아와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았소. 그리고 도무지 흥분되지 아니한 모양을 꾸몄소.
형! 어떻게나 힘드는 일이요? 참으면 참을수록 내 이빨이 마주 부딪고, 얼굴의 근육은 씰룩거리고 손은 불끈불끈 쥐어지오.
『정말 내일 가세요?』하고 아마 오 분 동안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정임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소.


『그럼, 가야지.』하고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소.
『저도 데리고 가세요!』하는 정임의 말은 마치 서릿발이 날리는 칼날과 같았소. 나는 깜짝 놀라서 정임을 바라보았소 그의 눈은 빛나고 . 입은 꼭 다물고 얼굴의 근육은 팽팽하게 켕겼소. 정임의 얼굴에는 찬바람이 도는 무서운 기운이 있었소. 나는 즉각적으로 죽기를 결심한 여자의 모양이라고 생각하였소. 열정으로 불덩어리가 되었던 정임은 내가 보이는 냉랭한 태도로 말미암아 갑자기 얼어 버린 것 같았소.
『어디를?』하고 나는 정임의 「저도 데리고 가세요」하는 담대한 말에 놀라면서 물었소.
『어디든지, 아버지 가시는 데면 어디든지 저를 데리고 가세요. 저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혼자서는 못 살 것을 지나간 반 달 동안에 잘 알았습니다. 아까 아버지 오셨다 가신 뒤에 생각해 보니깐 암만해도 아버지는 다시 저에게 와 보시지 아니하고 가실 것만 같애요. 그리고 저로 해서 아버지께서는 무슨 큰 타격을 당하신 것만 같으셔요. 처음 뵈올 적에 벌써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는 반드시 무슨 큰일이 나셨느니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어, 저로해서 그러신 것만 같고, 저를 버리시고 혼자 가시려는 것만 같고, 그래서 달려왔더니 여기 써 놓으신 편지를 보고‒‒‒‒‒그 편지에 다른 말씀은 어찌 됐든지, 네 일기를 보았다 하신 말씀을 보고는 다 알았습니다. 저와 한 방에 있는 애가 암만해도 어머니 스파인가 봐요. 제가 입원하기 전에도 제 눈치를 슬슬 보고 또 책상 서랍도 뒤지는 눈치가 보이길래 일기책은 늘 쇠 잠그는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아마 제가 정신 없이 앓고 누웠는 동안에 제 핸드백에서 쇳대를 훔쳐 갔던가봐요. 그래서는 그 일기책을 꺼내서 서울로 보냈나 봐요. 그걸루 해서 아버지께서는 불명예스러운‒‒‒‒‒누명을 쓰시고 학교일도 내놓으시게 되고 집도 떠나시게 되셨나봐요. 다시는 집에 안 돌아오실 양으로 결심을 하셨나봐요. 아까 병원에서도 하시는 말씀이 모두 유언하시는 것만 같아서 퍽 의심을 가졌었는데 지금 그 쓰시던 편지를 보고는 다 알았습니다.


그렇지만‒‒‒‒‒그렇지만.』
하고 웅변으로 내려 말하던 정임은 갑자기 복받치는 열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한 번 한숨을 지우고,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를 따라가요. 절루해서 아버지께서는 집도 잃으시고 명예도 잃으시고 사업도 잃으시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잃으셨으니 저는 아버지를 따라가요.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어린 딸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다가 아버지께서 먼저 돌아가시면 저도 따라 죽어서 아버지 발 밑에 묻힐 테야요. 제가 먼저 죽거든‒‒‒‒‒제가 병이 있으니깐 무론 제가 먼저 죽지요. 죽어도 좋습니다. 병원에서 앓다가 혼자 죽는 건 싫어요. 아버지 곁에서 죽으면 아버지께서, 오 내 딸 정임아 하시고 귀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겠지요. 그리고 제 몸을 어디든지 땅에 묻으시고 「사랑하는 내 딸 정임의 무덤」이라고 패라도 손수 쓰셔서 세워 주시지 않겠읍니까?』 하고 정임은 비쭉비쭉하다가 그만 무릎 위에 엎더져 울고 마오. 나는 다만 죽은 사람 모양으로 반쯤 눈을 감고 앉아 있었소. 가슴 속에는 정임의 곁에서 지지 않는 열정을 품으면서도, 정임의 말대로 정임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버리고 싶으면서도 나는 이 열정의 불길을 내 입김으로 꺼 버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이었소.
『아아, 제가 왜 났어요? 왜 하나님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셨어요? 아버지의 일생을 파멸시키려 난 것이지요? 제가 지금 죽어 버려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면 저는 죽어 버릴 터이야요. 기쁘게 죽어 버리겠습니다. 제가 여덟 살부터 오늘날까지 받은 은혜를 제 목숨 하나로 갚을 수가 있다면 저는 지금으로 죽어 버리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저는 다만 얼마라도 다만 하루라도 아버지 곁에서 살고
싶어요‒‒‒‒다만 하루만이라도, 아버지! 제가 왜 이렇습니까, 네? 제가 어려서 이렇습니까. 미친년이 되어서 이렇습니까. 아버지께서는 아실 테니 말씀해 주세요. 하루만이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 곁에서 살았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제 생각이 잘못이야요? 제 생각이 죄야요? 왜 죄입니까? 아버지, 저를 버리시고 혼자 가시지 마세요, 네? 「정임아, 너를 데리고 가마.」하고 약속해 주세요, 네.』
정임은 아주 담대하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하오. 그 얌전한, 수삽한 정임의 속에 어디 그러한 용기가 있었던가, 참 이상한 일이요. 나는 귀여운 어린 계집애 정임의 속에 엉큼한 여자가 들어앉은 것을 발견하였소. 그가 몇 가지 재료(내가 여행을 떠난다는 것과 제 일기를 보았다는 것)를 종합하여 나와 저와의 새에, 또 그 때문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 것을 추측하는 그 상상력도 놀랍거니와 그렇게 내 앞에서는 별로 입도 벌리지 아니하던 그가 이처럼 담대하게 제 속에 있는 말을 거리낌없이 다 해 버리는 용기를 아니 놀랄 수 없었소. 내가, 사내요 어른인 내가 도리어 정임에게 리드를 받고 놀림을 받음을 깨달았소. 그러나 정임을 위해서든지, 중년 남자의 위신을 위해서든지 나는 의지력으로, 도덕력으로, 정임을 누르고 훈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하였소‒‒‒‒‒


『정임아.』하고 나는 비로소 입을 열어서 불렀소. 내 어성은 장중하였소. 나는 할 수 있는 위엄을 다하여 「정임아」하고 부른 것이요.
『정임아, 네 속은 다 알았다. 네 마음 네 뜻은 그만하면 다 알았다. 네가 나를 그처럼 생각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기쁘게도 생각한다. 그러나 정임아…….』하고 나는 일층 태도와 소리를 엄숙하게 하여,
『네가 청하는 말은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내가 너를 친딸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죽고 조선에서 죽더라도 너는 죽어서 아니 된다 차마 너까지는 . 죽이고 싶지 아니하단 말이다. 내가 어디 가서 없어져 버리면 세상은 네게 씌운 누명이 애매한 줄을 알게 될 것이 아니냐. 그리되면 너는 조선의 좋은 일꾼이 되어서 일도 많이 하고 또 사랑하는 남편을 맞아서 행복된 생활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 그것이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이다. 내가 어디 가 있든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네가 잘되는 것만, 행복되게 사는 것만 바라보고 혼자 기뻐할 것이 아니냐. 네가 다 옳게 알았다. 나는 네 말대로 조선을 영원히 떠나기로 하였다. 그렇지마는 나는 이렇게 된 것을 조금도 슬퍼하지 아니한다. 너를 위해서 내가 무슨 희생을 한다고 하면 내게는 그것이 큰 기쁨이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인제는 세상이 싫어졌다. 더 살기가 싫어졌다. 내가 십여 년 동안 전 생명을 바쳐서 교육한 학생들에게까지 배척을 받을 때에는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가 난다.


그렇지마는 나는 이것이 다 내가 부족한 때문인 줄을 잘 안다. 나는 조선을
원망한다든가, 내 동포를 원망한다든가, 그럴 생각은 없다. 원망을 한다면 나 자신의 부족을 원망할 뿐이다. 내가 원체 교육을 한다든지 남의 지도자가 된다든지 할 자격이 없음을 원망한다면 원망할까, 내가 어떻게 조선이나 조선 사람을 원망하느냐. 그러니까 인제 내게 남은 일은 나를 조선에서 없애 버리는 것이다. 감히 십여 년간 교육가라고 자처해 오던 거짓되고 외람된 생활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남편 노릇도 못하고 아버지 노릇도 못 하는 사람이 남의 스승은 어떻게 되고 지도자는 어떻게 되느냐. 하니까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 버리는 것이 조금도 슬프지 아니하고 도리어 몸이 가뜬하고 유쾌해지는 것 같다. 오직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 선배요 사랑하는 동지이던 남선생의 유일한 혈육이던 네게다가 누명을 씌우고 가는 것이다.』
『그게 어디 아버지 잘못입니까?』하고 정임은 입술을 깨물었소.
『모두 제가 철이 없어서‒‒‒‒저 때문에.』하고 정임은 몸을 떨고 울었소.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내가 지금 세상을 버릴 때에 무슨 기쁨이 한 가지 남는 것이 있다고 하면 너 하나가, 이 세상에서 오직 너 하나가 나를 따라 주는 것이다. 아마 너도 나를 잘못 알고 따라 주는 것이겠지마는 세상이 다 나를 버리고,
처자까지도 다 나를 버릴 때에 오직 너 하나가 나를 소중히 알아 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정임아 너는 몸을 조심하여서 건강을 회복하여서 오래 잘 살고,
그리고 나를 생각해 다오.』하고 나도 울었소.
형! 내가 정임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잘못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때에 이런 말을 아니 할 수 없었소 왜 그런고 . 하니, 그것이 내 진정이니까. 나도 학교 선생으로, 교장으로, 또 주제넘게 지사로의 일생을 보내노라고 마치 오직 얼음 같은 의지력만 가진 사람 모양으로 사십 평생을 살아 왔지마는 내 속에도 열정은 있었던 것이요. 다만 그 열정을 누르고 죽이고 있었을 뿐이오. 무론 나는 아마 일생에 이 열정의 고삐를 놓아 줄 날이 없겠지요. 만일 내가 이 열정의 고삐를 놓아서 자유로 달리게 한다고 하면 나는 이 경우에 정임을 안고, 내 열정으로 정임을 태워 버렸을는지도 모르오. 그러나 나는 정임이가 열정으로 탈수록 나는 내 열정의 고삐를 두 손으로 꽉 붙들고 이를 악물고 매달릴 결심을 한 것이요.


열한 시!
『정임아. 인제 병원으로 가거라.』하고 나는 엄연하게 명령하였소.
『내일 저를 보시고 떠나시지요?』하고 정임은 눈물을 씻고 물었소.
『그럼, J 조교수도 만나고 너도 보고 떠나지.』하고 나는 거짓말을 하였소. 이 경우에 내가 거짓말쟁이라는 큰 죄인이 되는 것이 정임에게 대하여 정임을 위하여 가장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오. 정임은, 무서운 직각력과 상상력을 가진 정임은 내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듯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소. 나는 차마 정임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여 외면하여 버렸소.
정임은 수건으로 눈물을 씻고 체경 앞에 가서 화장을 고치고 그리고,
『저는 가요.』하고 내 앞에 허리를 굽혀서 작별 인사를 하였소.
『오, 가 자거라.』하고 나는 극히 범연하게 대답하였소. 나는 자리옷을 입었기 때문에 현관까지 작별할 수도 없어서 보이를 불러 자동차를 하나 준비하라고 명하고 내 방에서 작별할 생각을 하였소.
『내일 병원에 오세요?』하고 정임은 고개를 숙이고 낙루하였소.


『오, 가마.』하고 나는 또 거짓말을 하였소.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한 사람의 거짓말은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시겠지요. 설사 내가 거짓말을 한 죄로 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이 경우에 정임을 위하여 거짓말을 아니 할 수가 없지 않소? 내가 거짓말을 아니 하면 정임은 아니 갈 것이 분명하였소.
『전 가요.』하고 정임은 또 한 번 절을 하였으나 소리를 내어서 울었소.
『울지 마라! 몸 상한다.』하고 나는 정임에게 대한 최후의 친절을 정임의 곁에 한 걸음 가까이 가서 어깨를 또닥또닥하여 주고, 외투를 입혀 주었소.
『안녕히 주무세요.』하고 정임은 문을 열고 나가 버렸소.
정임의 걸어가는 소리가 차차 멀어졌소.
나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소.
창에 부딪히는 빗발 소리가 들리고 자동차 소리가 먼 나라에서 오는 것같이 들리오. 이것이 정임이가 타고 가는 자동차 소리인가.
나는 정임을 따라가서 붙들어 오고 싶었소. 내 몸과 마음은 정임을 따라서 허공에 떠가는 것 같았소. 아아 이렇게 나는 정임을 곁에 두고 싶을까. 이렇게 내가 정임의 곁에 있고 싶을까. 그러하건마는 나는 정임을 떼어버리고 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것은 애끓는 일이다. 기막히는 일이다! 그러나 내 도덕적 책임은 엄정하게 그렇게 명령하지 않느냐. 나는 이 도덕적 책임의 명령‒‒‒‒‒그것은 더위가 없는 명령이다‒‒‒‒‒을 털끝만치라도 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정임이가 호텔 현관까지 자동차를 타기 전에 한 번만 더 바라보는 것도 못할 일일까. 한 번만, 잠간만 더 바라보는 것도 못 할 일일까. 잠간만‒‒‒일 분만‒‒‒아니 일 초만‒‒‒한 시그마라는 극히 짧은 동안만 바라보는 것도 못 할 일일까. 아아 정임을 한 시그마 동안만 더 보고 싶다‒‒‒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벌떡 일어나서 도어의 핸들에 손을 대었소.
〈안 된다! 옳잖다!〉하고 나는 내 소파에 돌아와서 털썩 몸을 던졌소.
〈최후의 순간이 아니냐. 최후의 순간에 용감히 이겨야 할 것이 아니냐. 아서라! 아서라!〉하고 나는 혼자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소.
이때에 짜박짜박 하고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오. 내 가슴은 쌍방망이로 두들기는 것같이 뛰었소.
〈설마 정임일까?〉하면서도 나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소.
그 발자국 소리는 분명 내 문 밖에 와서 그쳤소. 그리고는 소리가 없었소.





그리드형

'▼TV재방송/기타 > E북&오디오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광수-유정, 1  (0) 2011.10.29
이광수-유정, 2  (0) 2011.10.29
이광수-유정, 3  (0) 2011.10.29
이광수-유정, 4  (0) 2011.10.29
이광수-유정, 6  (0) 2011.10.29
이광수-유정,7  (0) 2011.10.29
이광수-유정, 8  (0) 2011.10.29
이광수-유정, 9  (0) 2011.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