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V재방송/기타/E북&오디오북

이광수-유정, 6

by 핫PD 2011. 10. 29.
728x170


그러나 다음 순간 또 두어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소.
『이에스.』하고 나는 대답하고 문을 바라보았소.
문이 열렸소. 들어오는 이는 정임이었소.
『웬 일이냐?』하고 나는 엄숙한 태도를 지었소. 그것으로 일초의 일천분지 일이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던 정임을 보고 기쁨을 캄플라지한 것이요.
정임은 서슴지 않고 내 뒤에 와서 내 교의에 몸을 기대며,
『암만해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만 같아서, 다시 뵈올 기약은 없는 것만 같아서 가다가 도로 왔읍니다. 한 번만 더 뵙고 갈 양으로요. 그래 도로 와서도 들어올까 말까 하고 주저주저하다가 이것이 마지막인데 하고 용기를 내어서 들어왔읍니다. 내일 저를 보시고 가신다는 것이 부러 하신 말씀만 같고, 마지막 뵈옵고 뵈온대도‒‒‒‒
그래도
한 번 더 뵈옵기만 해도…….』하고 정임의 말은 끝을 아물지 못하였소. 그는 내 등 뒤에 서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볼 수가 없었소. 나는 다만 아버지의 위엄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오.
『정임아,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 네 뒤를 따라가고 싶었다. 내 몸과 마음은 네 뒤를 따라서 허공으로 날았다. 나는 너를 한 초라도 한 초의 천분지 일 동안이라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정임아, 내 진정은 너를 언제든지 내 곁에 두고 싶다. 정임아, 지금 내 생명이 가진 것은 오직 너뿐이다.』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었소. 그러나 이런 말을 하여서는 아니 되오! 만일 내가 이런 말을 하여 준다면 정임이가 기뻐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정임이에게 이런 기쁨을
주어서는 아니 되오!
나는 어디까지든지 아버지의 위엄, 아버지의 냉정함을 아니 지켜서는 아니 되오. 그렇지마는 내 가슴에 타오르는 이름지을 수 없는 열정의 불길은 내 이성과 의지력을 태워 버리려 하오. 나는 눈이 아뜩아뜩함을 깨닫소. 나는 내 생명의 불길이 깜박깜박함을 깨닫소. 그렇지마는! 아아 그렇지마는 나는 이 도덕적 책임의 무상 명령의 발령자인 쓴 잔을 마시지 아니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요.
『산! 바위!』
나는 정신을 가다듬어서 이것을 염하였소.
그러나 열정의 파도가 치는 곳에 산은 움직이지 아니하오? 바위는 흔들리지
아니하오? 태산과 반석이 그 흰 불길에 타서 재가 되지는 아니하오? 인생의 모든 힘 가운데 열정보다 더 폭력적인 것이 어디 있소? 아마도 우주의 모든 힘 가운데 사람의 열정과 같이 폭력적, 불가항력적인 것은 없으리라. 뇌성, 벽력, 글쎄 그것에나 비길까. 차라리 천체와 천체가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비상한 속력을 가지고 마주 달려들어서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없는 큰 소리와 우리가 굳다고 일컫는 금강석이라도 증기를 만들고야 말만한 열을 발하는 충돌의 순간에나 비길까. 형. 사람이라는 존재가 우주의 모든 존재 중에 가장 비상한 존재인 것 모양으로 사람의 열정의 힘은 우주의 모든 신비한 힘 가운데 가장 신비한 힘이 아니겠소? 대체 우주의 모든 힘은 그것이 아무리 큰 힘이라고 하더라도 저 자신을 깨뜨리는 것은 없소. 그렇지마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열정은 능히 제 생명을 깨뜨려 가루를 만들고 제 생명을 살라서 소지를 올리지 아니하오? 여보, 대체 이에서 더 폭력이요, 신비적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이오. 이때 내 상태, 어깨 뒤에서 열정으로 타고 섰는 정임을 느끼는 내 상태는 바야흐로 대폭발, 대충돌을 기다리는 아슬아슬한 때가 아니었소. 만일 조금만이라도 내가 내 열정의 고삐에 늦춤을 준다고 하면 무서운 대폭발이 일어났을 것이요.

『정임아!』하고 나는 충분히 마음을 진정해 가지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정임의 얼굴을 찾았소. 『네에.』하고 정임은 입을 약간 내 귀 가까이로 가져와서 그 씨근거리는 소리가 분명히 내 귀에 들리고 그 후끈후끈하는 뜨거운 입김이 내 목과 뺨에 감각되었소. 억지로 진정하였던 내 가슴은 다시 설레기를 시작하였소. 그 불규칙한 숨소리와 뜨거운 입김 때문이었을까.
『시간 늦는다. 어서 가거라. 이 아버지는 언제까지든지 너를 사랑하는 딸로 소중히 소중히 가슴에 품고 있으마. 또 후일에 다시 만날 때도 있을지 아느냐. 설사 다시 만날 때가 없다기로니 그것이 무엇이 그리 대수냐. 나이 많은 사람은 먼저 죽고 젊은 사람은 오래 살아서 인생의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 너는 몸이 아직 약하니 마음을 잘 안정해서 어서 건강을 회복하여라. 그리고 굳세게 굳세게, 힘 있게 힘 있게 살아다고. 조선은 사람을 구한다. 나 같은 사람은 인제 조선서 더 일할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지마는 네야 어떠냐. 설사 누가 무슨 말을 해서 학교에서 학비를 아니 준다거던 내가 네게 준 재산을 가지고 네 마음대로 공부를 하려무나.
네가 그렇게 해 주어야 나를 위하는 것이다. 자 인제 가거라. 네 앞길이 양양하지 아니하냐. 자 인제 가거라. 나는 내일 아침 동경을 떠날란다. 자 어서.』
하고 나는 화평하게 웃는 낯으로 일어섰소.
정임은 울먹울먹하고 고개를 숙이오.
밖에서는 바람이 점점 강해져서 소리를 하고 유리창을 흔드오.
『그럼, 전 가요.』하고 정임은 고개를 들었소.
그래 어서 『. 가거라. 벌써 열한시 반이다. 병원 문은 아니 닫니.』
정임은 대답이 없소.
『어서!』하고 나는 보이를 불러 자동차를 하나 준비하라고 일렀소.
『갈랍니다.』하고 정임은 고개를 숙여서 내게 인사를 하고 문을 향하여 한 걸음 걷다가 잠간 주저하더니, 다시 돌아서서,
『저를 한 번만 안아 주셔요. 아버지가 어린 딸을 안듯이 한 번만 안아 주셔요.』하고 내 앞으로 가까이 와 서오.
나는 팔을 벌려 주었소. 정임은 내 가슴을 향하고 몸을 던졌소. 그리고 제 이뺨 저뺨을 내 가슴에 대고 비볐소. 나는 두 팔을 정임의 어깨 위에 가벼이 놓았소. 이러한지 몇 분이 지났소. 아마 일 분도 다 못 되었는지 모르오.
정임은 내 가슴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뚫어지게 우러러보더니, 다시 내 가슴에 낯을 대더니‒‒‒‒‒아마 내 심장이 무섭게 뛰는 소리를‒‒‒‒‒‒정임은 들었을 것이요 정임은 다시 고개를 들고,
『어디를 가시든지 편지나 주셔요.』하고 굵은 눈물을 떨구고는 내게서 물러서서 또 한 번 절하고,
『안녕히 가셔요. 만주든지 아령이든지 조선 사람 많이 사는 곳에 가셔서 일하고 사셔요. 돌아가실 생각은 마셔요. 제가, 아버지 말씀대로 혼자 떨어져 있으니 아버지도 제 말씀대로 돌아가실 생각은 마셔요, 네, 그렇다고 대답하셔요!』하고는 또 한 번 내 가슴에 몸을 기대오.


죽기를 결심한 나는 「오냐, 그러마」하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소. 그래서,
『오, 내 살도록 힘쓰마.』하는 약속을 주어서 정임을 돌려보냈소.
정임의 발자국 소리가 안 들리게 된 때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옥상 정원으로
나갔소. 비가 막 뿌리오. 나는 정임이가 타고 나가는 자동차라도 볼 양으로 호텔 현관 앞이 보이는 꼭대기로 올라갔소. 현관을 떠난 자동차 하나가 전찻길로 나서서는 북을 향하고 달아나서 순식간에 그 꽁무니에 달린 붉은 불조차 스러져 버리고 말았소. 나는 미친 사람 모양으로,
『정임아, 정임아!』하고 수없이 불렀소. 나는 사 층이나 되는 이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정임이가 타고 간 자동차의 뒤를 따르고 싶었소.
『아아 영원한 인생의 이별!』
나는 그 옥상에 얼마나 오래 섰던지를 모르오. 내 머리와 낯과 베드로움에서는 물이 흐르오. 방에 들어오니 정임이가 끼치고 간 향기와 추억만 남았소.
나는 방 안 구석구석에 정임의 모양이 보이는 것을 깨달았소. 특별히 정임이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내 교의 뒤에는 분명히 갈색 외투를 입은 정임의 모양이 완연하오.
『정임아!』하고 나는 그 곳으로 따라가오. 그러나 가면 거기는 정임은 없소.
나는 교의에 앉소. 그러면 정임의 씨근씨근하는 숨소리와 더운 입김이 분명 내 오른편에 감각이 되오. 아아 무서운 환각이여!
나는 자리에 눕소. 그리고 정임의 환각을 피하려고 불을 끄오. 그러면 정임이가 내게 안기던 자리쯤에 환하게 정임의 모양이 나타나오.
나는 불을 켜오. 또 불을 끄오.
날이 밝자 나는 비가 개인 것을 다행으로 비행장에 달려가서 비행기를 얻어 탔소. 나는 다시 조선의 하늘을 통과하기가 싫어서 북강에서 비행기에서 내려서 문사에 와서 대련으로 가는 배를 탔소. 나는 대련에서 내려서 하룻밤을 여관에서 자고는 곧 장춘(지금은 신경이지마는 그때에는 장춘)가는 급행을 탔소. 무론 아무에게도 엽서 한 장 한 일 없었소. 그것은 인연을 끊은 세상에 대하여 연연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까닭이오.
차가 옛날에는 우리 조상네가 살고 문화를 짓던 옛 터전인 만주의 벌판을 달릴 때에는 감회도 없지 아니하였소.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한가한 감상을 쓸 겨를이 없소. 내가 믿고 가는 곳은 하르빈에 있는 어떤 친구요. 그는 R라는 사람으로서 경술년에 A 씨 등의 망명객을 따라 나갔다가 아라사에서 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아라사 사관으로서 구주 대전에도 출정을 하였다가, 혁명 후에도 이내 적위군에 머물러서 지금까지 소비에트 장교로 있는 사람이오. 지금은 육군 소장이라던가. 나는 하르빈에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요. 그 사람을 찾아야 아라사에 들어갈 여행권을 얻을 것이요, 여행권을 얻어야 내가 평소에 이상하게도 그리워하던 바이칼호를 볼 것이요. 하르빈에 내린 것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이었소. 나는 안중근이 이등 박문을 쏜 곳이 어딘가 하고 벌판과 같이 넓은 플랫폼에 내렸소.
 
과연 국제 도시라 서양 사람 , 중국 사람, 일본 사람이 각기 제 말로 지껄이오. 아아 조선 사람도 있을 것이요마는 다들 양복을 입거나 청복을 입거나 하고 또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말도 잘 하지 아니하여 아무쪼록 조선 사람인 것을 표시하지 아니하는 판이라 그 골격과 표정을 살피기 전에는 어느 것이 조선 사람인지 알 길이 없소. 아마 허름하게 차리고 기운 없이, 비창한 빛을 띠고 사람의 눈을 슬슬 피하는 저 순하게 생긴 사람들이 조선 사람이겠지요. 언제나 한 번 가는 곳마다 동양이든지,
서양이든지,
『나는 조선 사람이오!』하고 뽐내고 다닐 날이 있을까 하면 눈물이 나오. 더구나, 하르빈과 같은 각색 인종이 모여서 생존 경쟁을 하는 마당에 서서 이런 비감이 간절하오. 아아 이 불쌍한 유랑의 무리 중에 나도 하나를 더 보태는가 하면 눈물을 씻지 아니할 수 없었소. 나는 역에서 나와서 어떤 아라사 병정 하나를 붙들고 R의 아라사 이름을 불렀소. 그리고 아느냐고 영어로 물었소.
그 병정은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지, 또는 R를 모르는지 무엇이라고 아라사말로 지껄이는 모양이나 나는 무론 그것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소. 그러나 나는 그 병정의 표정에서 내게 호의를 가진 것을 짐작하고 한 번 더 분명히,
『요십——— 알렉산드로비치————리가이.』라고 불러 보았소.
그 병정은 빙그레 웃고 고개를 흔드오. 이 두 외국 사람의 이상한 교섭에 흥미를 가지고 여러 아라사 병정과 동양 사람들이 십여 인이나 우리 주위에 모여 드오. 그 병정이 나를 바라보고 또 한 번 그 이름을 불러 보라는 모양 같기로 나는 이번에는 R의 아라사 이름에 「제너럴」이라는 말을 붙여 불러 보았소. 그랬더니 어떤 다른 병정이 뛰어들며,
『게네라우 리가이 R』하고 안다는 표정을 하오. 게네라우라는 것이 아마 아라사말로 장군이란 말인가 하였소.
『예스. 예스.』하고 나는 기쁘게 대답하였소.
그리고는 아라사 병정들끼리 무에라고 지껄이더니, 그 중에 한 병정이 나서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제가 마차 하나를 불러서 나를 태우고 저도 타고 어디로 달려가오. 그 아라사 병정은 친절히, 알지도 못하는 말로 이것저것을 가리키면서 설명을 하더니 내가 못 알아듣는 줄을 생각하고 내 어깨를 툭 치고 웃소. 어린애와 같이 순한 사람들이구나 하고 나는 고맙다는 표로 고개만 끄덕끄덕하였소.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서양 시가로 달려가다가 어떤 큰 저택 앞에 이르러서 마차를 그 현관 앞으로 들이 몰았소.


현관에서는 종졸이 나왔소 내가 . 명함을 들여보냈더니 부관인 듯한 아라사 장교가 나와서 나를 으리으리한 응접실로 인도하였소. 얼마 있노라니 중년이 넘은 어떤 대장이 나오는데 군복에 칼끈만 늘였소.
『이게 누구요.』하고 그 대장은 달려들어서 나를 껴안았소. 이십 오년만에 만나는 우리는 서로 알아본 것이요. 이윽고 나는 그의 부인과 자녀들도 만났소. 그들은 다 아라사 사람이오. 저녁이 끝난 뒤에 나는 R의 부인과 딸의 음악과 그림 구경과 기타의 관대를 받고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소. 경술년 당시 이야기도 나오고, A 씨의 이야기도 나오고, R의 신세타령도 나오고, 내 이십 오년간의 생활 이야기도 나오고, 소비에트 혁명 이야기도 나오고, 하르빈 이야기도 나오고, 우리네가 어려서 서로 사귀던 회구담도 나오고 이야기가 그칠 바를 몰랐소.
『조선은 그립지 않은가?』하는 내 말에 쾌활하던 R은 고개를 숙이고 추연한 빛을 보였소.
나는 R의 추연한 태도를 아마 고국을 그리워하는 것으로만 여겼소. 그래서 나는 그리 침음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고국이 그립겠나. 나는 고국을 떠난 지가 일 주일도 안 되건마는 못
견디게 그리운데.』하고 동정하는 말을 하였소.
했더니, 이 말 보시오. 그는 침음을 깨뜨리고 고개를 번쩍 들며,
『아니! 나는 고국이 조금도 그립지 아니하이. 내가 지금 생각한 것은 자네 말을 듣고 고국이 그리운가 그리워할 것이 있는가를 생각해 본 것일세. 그랬더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나는 고국이 그립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어. 그야 어려서 자라날 때에 보던 강산이라든지 내 기억에 남은 아는 사람들이라든지, 보고 싶다 하는 생각도 없지 아니하지마는 그것이 고국이 그리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그밖에는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고국이 그리운 것을 찾을 길이 없네. 나도 지금 자네를 보고 또 자네 말을 듣고 오래 잊어버렸던 고국을 좀 그립게, 그립다 하게 생각하려고 해 보았지마는 도무지 나는 고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나지 않네.』이 말에 나는 깜짝 놀랐소. 몸서리치게 무서웠소. 나는 해외에 오래 표랑하는 사람은 으레 고국을 그리워할 것으로 믿고 있었소. 그런데 이 사람이, 일찍은 고국을 사랑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려던 이 사람이 도무지 이처럼 고국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놀라운 정도를 지나서 괘씸하기 그지없었소. 나도 비록 조선을 떠난다고, 영원히 버린다고 나서기는 했지마는 나로는 죽기 전에는 아니 비록 죽더라도 잊어버리지 못할 고국을 잊어버린 R의 심사가 난측하고 원망스러웠소.
『고국이 그립지가 않아?』하고 R에게 묻는 내 어성에는 격분한 빛이 있었소.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 하지만 고국에 무슨 그리울 것이 있단 말인가. 그 빈대 끓는 오막살이가 그립단 말인가. 나무 한 개 없는 산이 그립단 말인가. 물보다도 모래가 많은 다 늙어빠진 개천이 그립단 말인가. 그 무기력하고 가난한, 시기 많고 싸우고 하는 그 백성을 그리워한단 말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그리워할 음악이 있단 말인가, 미술이 있단 말인가, 문학이 있단 말인가, 사상이 있단 말인가, 사모할 만한 인물이 있단 말인가! 날더러 고국의 무엇을 그리워하란 말인가. 나는 조국이 없는 사람일세. 내가 소비에트 군인으로 있으니 소비에트가 내 조국이겠지. 그러나 진심으로 내 조국이라는 생각은 나지 아니하네.』하고 저녁 먹을 때에 약간 붉었던 R의 얼굴은 이상한 흥분으로 더욱 불거지오.


R는 먹던 담배를 화나는 듯이 재떨이에 집어던지며,
『내가 하르빈에 온 지가 인제 겨우 삼사 년밖에 안 되지마는 조선 사람 때문에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와서 달라는 것도 달라는 것이지마는 조선 사람이 또 어찌하였느니 또 어찌하였느니 하는 불명예한 말을 들을 때에는 나는 금시에 죽어버리고 싶단 말일세. 내게 가장 불쾌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고국이라는 기억과 조선 사람의 존잴세. 내가 만일 어느 나라의 독재자가 된다고 하면 나는 첫째로 조선인 입국 금지를 단행하려네. 만일 조선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약이 있다고 하면 나는 생명과 바꾸어서라도 사 먹고 싶어.』
하고 R는 약간 흥분된 어조를 늦추어서, 『나도 모스크바에 있다가 처음 원동에 나왔을 적에는 길을 다녀도 혹시 동포가 눈에 뜨이지나 아니하나 하고 찾았네. 그래서 어디서든지 동포를 만나면 반가이 손을 잡았지. 했지만 점점 그들은 오직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단 말일세. 인제는 조선 사람이라고만 하면 만나기가 무섭고 끔찍끔찍하고 진저리가 나는 걸 어떡허나. 자네 명함이 들어온 때에도 조선 사람인가 하고 가슴이 뜨끔했네.』
하고 R는 웃지도 아니하오. 그의 얼굴에는, 군인다운 기운찬 얼굴에는 증오와 분노의 빛이 넘쳤소.
『나도 자네 집에 환영받는 나그네는 아닐세그려.』
하고 나는 이 견디기 어려운 불쾌하고 무서운 공기를 완화하기 위하여 농담삼아 한 마디를 던지고 웃었소.
나는 R의 말이 과격함에 놀랐지마는, 또 생각하면 R이 한 말 가운데는 들을 만한 이유도 없지 아니하오. 그것을 생각할 때에 나는 R을 괘씸하게 생각하기 전에 내가 버린다는 조선을 위하여서 가슴이 아팠소 . 그렇지만 이제 나따위가 가슴을 아파한대야 무슨 소용이 있소. 조선에 남아 계신 형이나 R의 말을 참고삼아 쓰시기 바라오. 어쨌으나 나는 R에게서 목적한 여행권을 얻었소. R에게는 다만, 『나는 피곤한 몸을 좀 정양하고 싶다. 나는 내가 평소에 즐겨하는 바이칼호반에서 눈과 얼음의 한겨울을 지내고 싶다.』는 것을 여행의 이유로 삼았소. R은 나의 초췌한 모양을 짐작하고 내 핑계를 그럴듯하게 아는 모양이었소. 그리고 날더러, 「이왕 정양하려거든 코가서스 지방으로 가거라. 거기는 기후 풍경도 좋고 또 요양원의 설비도 있다.」는 것을 말하였소. 나도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기타의 여행기 등속에서 이 지방에 관한 말을 못 들은 것이 아니나 지금 내 처지에는 그런 따뜻하고 경치 좋은 지방을 가릴 여유도 없고 또 그러한 지방보다도 눈과 얼음과 바람의 시베리아의 겨울이 합당한 듯하였소. 그러나 나는 R의 호의를 굳이 사양할 필요도 없어서 그가 써 주는 대로 소개장을 다 받아 넣었소. 그는 나를 처남 매부간이라고 소개해 주었소. 나는 모스크바 가는 다음 급행을 기다리는 사흘 동안 R의 집의 손이 되어서 R부처의 친절한 대우를 받았소. 그 후에는 나는 R과 조선에 관한 토론을 한 일은 없지마는 R가 이름지어 말을 할 때에는 조선을 잊었노라, 그리워할 것이 없노라, 하지마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할때에는 조선을 못 잊고 또 조선을 여러 점으로 그리워하는 양을 보았소. 나는 그것으로써 만족하게 여겼소. 나는 금요일 오후 세시 모스크바 가는 급행으로 하르빈을 떠났소. 역두에는 R과 R의 가족이 나와서 꽃과 과일과 여러 가지 선물로 나를 전송하였소. R과 R의 가족은 나를 정말 형제의 예로 대우하여 차가 떠나려 할 때에 포옹과 키스로 작별하여 주었소. 이 날은 퍽 따뜻하고 일기가 좋은 날이었소. 하늘에 구름 한 점, 땅에 바람 한 점 없이 마치 늦은 봄날과 같이 따뜻한 날이었소.


차는 떠났소. 판다는둥 안 판다는둥 말썽 많은 동중로(지금은 북만 철로라고
하오————작자의 말)의 국제 열차에 몸을 의탁한 것이요.
송화강의 철교를 건너오. 아아 그리도 낯익은 송화강! 송화강이 왜 낯이 익소. 이 송화강은 불함산(장백산)에 근원을 발하여 광막한 북만주의 사람도 없는 벌판을 혼자 소리도 없이 흘러가는 것이 내 신세와 같소. 이 북만주의 벌판을 만든 자가 송화강이지마는 나는 그만한 힘이 없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오. 이 광막한 북만의 벌판을 내 손으로 개척하여서 조선 사람의 낙원을 만들자 하고 뽐내어 볼까. 그것은 형이 하시오. 내 어린것이 자라거든 그놈에게나 그러한 생각을 넣어 주시오. 동양의 국제적 괴물인 하르빈 시가도 까맣게 안계에서 스러져 버리고 말았소. 그러나 그 시가를 싼 까만 기운이 국제적 풍운을 포장한 것이라고 할까요. 가도가도 벌판 서리맞은 마른 . 풀 바다. 실개천 하나도 없는 메마른 사막. 어디를 보아도 산 하나 없으니 하늘과 땅이 착 달라붙은 듯한 천지. 구름 한 점 없건만도 그 큰 태양 가지고도 미처 다 비추지 못하여 지평선————호를 그린 지평선 위에는 항상 황혼이 떠도는 듯한 세계. 이 속으로 내가 몸을 담은 열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해가 가는 걸음을 따라서 달리고 있소. 열차가 달리는 바퀴 소리도 반향할 곳이 없어 힘없는 한숨같이 스러지고 마오. 기쁨 가진 사람이 지루해서 못 견딜 이 풍경은 나같이 수심 가진 사람에게는 가장 공상의 말을 달리기에 합당한 곳이오. 이곳에도 산도 있고 냇물도 있고 삼림도 있고 꽃도 피고 날짐승, 길짐승이 날고 기던 때도 있었겠지요. 그러던 것이 몇 만 년 지나는 동안에 산은 낮아지고 골은
높아져서 마침내 이 꼴이 된 것인가 하오. 만일 큰 힘이 있어 이 광야를 파낸다 하면 물 흐르고 고기 놀던 강과, 울고 웃던 생물이 살던 자취가 있을 것이요. 아아 이 모든 기억을 꽉 품고 죽은 듯이 잠잠한 광야에! 내가 탄 차가 F 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북만주 광야의 석양의 아름다움은 그 극도에 달한 것 같았소. 둥긋한 지평선 위에 거의 걸린 커다란 해! 아마 그 신비하고
장엄함이 내 경험으로는 이곳에서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오. 이글이글 이글이글 그러면서도 둥글다는 체모를 변치 아니하는 그 지는 해!
게다가 먼 지평선으로부터 기어드는 황혼은 인제는 대지를 거의 다 덮어 버려서 마른 풀로 된 지면은 가뭇가뭇한 빛을 띠고 사막의 가는 모래를 머금은 지는 해의 광선을 반사하여서 대기는 짙은 자줏빛을 바탕으로 한 가지각색의 명암을 가진, 오색이 영롱한, 도무지 내가 일찍 경험해 보지 못한 색채의 세계를 이루었소.

좋다!
그 속에 수은같이 빛나는, 수 없는 작고 큰 호수들의 빛! 그 속으로 날아오는
수없고 이름 모를 새들의 떼도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하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차에서 뛰어내렸소. 거의 떠날 시간이 다 되어서 짐의 일부분은 미처 가지지도 못하고 뛰어내렸소. 반쯤 미친 것이요.
정거장 앞 조그마한 아라사 사람의 여관에다가 짐을 맡겨 버리고 나는 단장을 끌고 철도 선로를 뛰어 건너서 호수의 수은빛 나는 곳을 찾아서 지향 없이 걸었소. 한 호수를 가서 보면 또 저 편 호수가 더 아름다워 보이오. 원컨대 저 지는 해가 다 지기 전에 이 광야에 있는 호수를 다 돌아보고 싶소.
내가 호숫가에 섰을 때에 그 거울같이 잔잔한 호수면에 비치는 내 그림자의
외로움이여 그러나 아름다움이여 , ! 그 호수는 영원한 우주의 신비를 품고 하늘이 오면 하늘을, 새가 오면 새를, 구름이 오면 구름을, 그리고 내가 오면 나를 비추지 아니하오. 나는 호수가 되고 싶소. 그러나 형! 나는 이 호수면에서 얼마나 정임의 얼굴을 찾았겠소. 그것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동경의 병실에 누워 있는 정임의 모양이 몽고 사막의 호수면에 비칠 리야 있겠소. 없겠지마는 나는 호수마다 정임의 그림자를 찾았소. 그러나 보이는 것은 외로운 내 그림자뿐이오.
〈가자. 끝없는 사막으로 한없이 가자. 가다가 내 기운이 진하는 자리에 나는 내 손으로 모래를 파고 그 속에 내 몸을 묻고 죽어 버리자. 살아서 다시 볼 수 없는 정임의 「이데아」를 안고 이 깨끗한 광야에서 죽어 버리자.〉
하고 나는 지는 해를 향하고 한정 없이 걸었소. 사막이 받았던 따뜻한 기운은 아직도 다 식지는 아니하였소. 사막에는 바람 한 점도 없소. 소리 하나도 없소. 발자국 밑에서 우는 마른 풀과 모래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오.
나는 허리를 지평선에 걸었소. 그 신비한 광선은 내 가슴으로부터 위에만을 비추고 있소. 문득 나는 해를 따라가는 별 두 개를 보았소. 하나는 앞을 서고 하나는 뒤를 섰소. 앞의 별은 좀 크고 뒤의 별은 좀 작소. 이런 별들은 산 많은 나라 ——— 다시 말하면 서쪽 지평선을 보기 어려운 나라에서만 생장한 나로서는 보지 못하던 별이오. 나는 그 별의 이름을 모르오. 「두 별」이오.
해가 지평선에서 뚝 떨어지자 대기의 자줏빛은 남빛으로 변하였소. 오직 해가 금시 들어간 자리에만 주홍빛의 여광이 있을 뿐이오. 내 눈앞에서는 남빛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하였소. 앞에 보이는 호수만이 유난히 빛나오. 또 한 떼의 이름 모를 새들이 수면을 스치며 날 저문 것을 놀라는 듯이 어지러이 날아 지나가오. 그들은 소리도 아니 하오. 날개치는 소리도 아니 들리오. 그것들은 사막의 황혼의 허깨비인 것 같소.


나는 자꾸 걷소. 해를 따르던 나는 두 별을 따라서 자꾸 걷소.
별들은 진 해를 따라서 바삐 걷는 것도 같고, 헤매는 나를 어떤 나라로 끄는 것도 같소. 아니 두 별 중에 앞선 별이 한 번 반짝하고는————최후로 한 번 반짝하고는 지평선 밑에 숨어 버리고 마오. 뒤에 남은 외별의 외로움이여! 나는 울고 싶었소. 그러나 나는 하나만 남은 작은 별————외로운 작은 별을 따라서 더 빨리 걸음을 걸었소. 그 한 별마저 넘어가 버리면 나는 어찌하오. 내가 웬일이요. 나는 시인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나는 정으로 행동한 일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오. 그러나 형! 이때에 미친 것이 아니요, 내 가슴에는 무엇인지 모를 것을 따를 요샛말로 이른바 동경으로 찼소.





그리드형

'▼TV재방송/기타 > E북&오디오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광수-유정, 2  (0) 2011.10.29
이광수-유정, 3  (0) 2011.10.29
이광수-유정, 4  (0) 2011.10.29
이광수-유정, 5  (0) 2011.10.29
이광수-유정,7  (0) 2011.10.29
이광수-유정, 8  (0) 2011.10.29
이광수-유정, 9  (0) 2011.10.29
이광수-유정, 10  (0) 2011.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