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지자는 우리는 철학자도 …… 시인도 아니지마는 우리들의 환경이 우리 둘에게 그러한 생각을 넣어 준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것을 저이가 물끄러미 보고 있더니 자기도 내곁에 들어와 눕겠지요. 그런 뒤에는 황혼에 남은 빛도 다 스러지고 아주 캄캄한 암흑 세계가 되어버렸지요. 하늘에 어떻게 그렇게 별이 많은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참 별이 많아요. 우주란 참 커요. 그런데 이 끝없이 큰 우주에 한없이 많은 별들이 다 제자리를 지키고 제 길을 지켜서 서로 부딪지도 아니하고 끝없이 긴 시간에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주에는 어떤 주재하는 뜻, 섭리하는 뜻이 있다 하는 생각이 나겠지요. 나도 예수교인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마는 이때처럼 하나님이라 할까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우주의 섭리자의 존재를 강렬하게 의식한 일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에 비기면 저까짓 별들이 다 무엇이오?」하고 그때 겨우 열 여덟 살 밖에 안 된 이이가 내 귀에 입을 대고 말할 때에는 나도 참으로 놀랐습니다. 나이는 나보다 오륙년 상관밖에 안 되지마는 이십 세 내외에 오륙년 상관이 적은 것인가요? 게다가 나는 선생이요 자기는 학생이니까 어린애로만 알았던 것이 그런 말을 하니 놀랍지 않아요? 어째서 사람의 마음이 하늘보다도 더 이상할까 하고 내가 물으니까, 그 대답이,———「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지마는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이 하늘이나 땅에 일어나는 모든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알 수 없고 더 뜨겁고 그런 것 같아요.」그러겠지요. 생명이란 모든 아름다운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어요. 그 말에. 그렇다하면 이 아름답고 신비한 생명을 내는 우주는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요? 하고 내가 반문하니까, 당신(부인을 향하여) 말이, 전 모르겠어요, 어쨌으나 전 행복합니다. 저는 이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놓쳐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 행복————선생님 곁에 있는 이 행복을 꽉 안고 죽고 싶어요. 그러지 않았소?』
『누가 그랬어요? 아이 난 다 잊어버렸어요.』하고 부인은 차를 따르오.
R는 인제는 하하하 하는 웃음조차 잊어버리고, 부인에게 농담을 붙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그야말로 종교적 엄숙 그대로 말을 이어,『자 저는 약을 먹어요 하고 손을 입으로 가져가는 동작이 감행되겠지요. 약이란것은 하르빈에서 준비한 아편이지요. 하르빈서 치타까지 가는 동안에 흥안령이나 어느 삼림 지대나 어디서나 죽을 자리를 찾자고 준비한 것이니까. 나는 입 근처로 가는
그의 손을 붙들었어요. 붙들면서 나는, 잠간만 기다리오. 오늘 밤 안으로 그 약을 먹으면 고만이 아니요? 이 행복된 순간을 잠간이라도 늘입시다. 달 올라올 때까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선생님도 행복되셔요 선생님은 「? 불행이시지. 저 때문에 불행이시지. 저만 이곳에 묻어 주시구는 선생님은 세상에 돌아가 사셔요, 오래오래 사셔요, 일 많이 하고 사셔요.」하고 울지 않겠어요. 나는 그때에 내 아내가 하던 말을 한 마디도 잊지 아니합니다. 그 말을 듣던 때의 내 인상은 아마 일생 두고 잊히지 아니하겠지요. 나는 자백합니다. 그 순간에 나는 처음으로 내 아내를 안고 키스를 하였지요. 내 속에 눌리고 눌리고 쌓이고 하였던 열정이 그만 일시에 폭발되었던 것이요. 아아 이것이 최초의 것이요, 동시에 최후의 것이로구나 할 때에 내 눈에서는 끓는 듯한
눈물이 흘렀소이다. 두 사람의 심장이 뛰는 소리, 두 사람의 풀무 불길 같은 숨소리. 이윽고 달이 떠올라왔읍니다. 가이없는 벌판이니까 달이 뜨니까 갑자기 천지가 환해지고 우리 둘이 손으로 파서 쌓아 놓은 흙 무데기가 이 산 없는 세상에 산이나 되는 것같이 조그마한 검은 그림자를 지고 있겠지요.
「자 우리 달빛을 띠고 좀 돌아다닐까.」하고 나는 아내를 안아 일으켰지요. 내 팔에 안겨서 고개를 뒤로 젖힌 내 아내의 얼굴이 달빛에 비친 양을 나는 잘 기억합니다. 실신한 듯한, 만족한 듯한, 그리고도 절망한 듯한 그 표정을 무엇으로 그릴지 모릅니다. 그림도 그릴 줄 모르고 조각도 할 줄 모르고 글도 쓸 줄 모르는 내가 그것을 어떻게 그립니까. 그저 가슴 속에 품고 이렇게 오늘의 내 아내를 바라볼 뿐이지요. 나는 내 아내를 팔에 걸고————네, 걸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요———— 이렇게 팔에다 걸고 달빛을 받은 황량한 벌판, 아무리 하여도 환하게 밝아지지는 아니하는 벌판을 헤매었습니다. 이따금 내 아내가, 어서 죽고 싶어요, 전 죽고만 싶어요, 하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 하고. 죽고 싶다는 그 말은 무론 진정일 것이지요. 아무리 맑은 일기라 하더라도 오후가 되면 흐려지는 법이니까 오래 살아가는 동안에 늘 한
모양으로 이 순간같이 깨끗하고 뜨거운 기분으로 갈 수는 없지 않아요. 불쾌한 일도 생기고, 보기 흉한 일도 생길는지 모르거든. 그러니까 이 완전한 깨끗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행복 속에 죽어 버리자는 뜻을 나는 잘 알지요. 더구나 우리들이 살아 남는대야 앞길이 기구하지 평탄할 리는 없지 아니해요? 그래서 나는, 죽지, 우리 이 달밤에 실컷 돌아다니다가, 더 돌아다니기가 싫거든 그 구덩에 돌아가서 약을 먹읍시다. 이렇게 말하고 우리 둘은 헤맸지요. 낮에 보면 어디까지나 평평한 벌판인것만 같지마는 달밤에 보면 이 사막에도 아직 채 스러지지 아니한 산의 형적이 남아 있어서 군데군데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있겠지요. 그 그림자 속에는 걸어 들어가면 어떤 데는 우리 허리만큼 그림자에 가리우고 어떤 데는 우리 둘을 다 가리워 버리는데도 있단 말야요. 죽음의 그림자라는 생각이 나면 그래도 몸에 소름이 끼쳐요. 차차 달이 높아지고 추위가 심해져서 바람결이 지나갈 때에는 눈에서 눈물이 날 지경이지요 원체 대기 중에 수분이 . 적으니까 서리도 많지 않지마는, 그래도 대기
중에 있는 수분은 다 얼어 버려서 얼음가루가 되었는 게지요.
공중에는 반짝반짝하는 수정가루 같은 것이 보입니다. 낮에는 땀이 흐를이만큼 덥던 사막도 밤이 되면 이렇게 기온이 내려가지요. 춥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춥다는 말은 아니 하고 우리는 어떤 때에는 달을 따라서, 어떤 때에는 달을 등지고, 어떤 때에는 호수에 비친 달을 굽어보고, 이 모양으로 한없이 말도 없이 돌아다녔지요. 이 세상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힘껏 의식하려는 듯이. 마침내 「나는 더 못 걸어요.」하고 이이가 내 어깨에 매달려 버리고 말았지요.』 하고 R가 부인을 돌아보니 부인은 편물하던 손을 쉬고, 『다리가 아픈 줄은 모르겠는데 다리가 이리 뉘고 저리 뉘구 해서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어요. 춥기는 하구.』 하고 소리를 내어서 웃소.
『그럴 만도 하지.』하고 R는 긴장한 표정을 약간 풀고 앉은 자세를 잠간 고치며, 『그 후에 그날 밤 돌아다닌 곳을 더듬어 보니까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마는 삼십리는 더 되는 것 같거든. 다리가 아프지 아니할 리가 있나.』
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말을 계속하오————.
『그래서 나는 내 외투를 벗어서, 이이(부인)를 싸서 어린애 안듯이 안고 걸었지요. 외투로 쌌으니 자기도 춥지 않구, 나는 또 무거운 짐을 안았으니 땀이 날 지경이구, 그뿐 아니라 내가 제게 주는 최후의 서비스라 하니 기쁘고, 말하자면 일거삼득이지요. 하하하하. 지난 일이니 웃지마는 그때 사정을 생각해 보세요, 어떠했겠나.』하고 R는 약간 처참한 빛을 띠면서,『그러니 그 구덩이를 어디 찾을 수가 있나. 얼마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아무 데서나
죽을 생각도 해 보았지마는 몸뚱이를 그냥 벌판에 내놓고 죽고 싶지는 아니하고 또 그 구덩이가 우리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기어코 그것을 찾아내고야 말았지요. 그때는 벌써 새벽이 가까웠던 모양이오. 열 시나 넘어서 뜬 하현 달이 낮이 기울었으니 그렇지 않겠어요. 그 구덩이에 와서 우리는 한 번 더 하늘과 달과 별과, 그리고 마음 속에 떠오른 사람들과 하직하고 약 먹을 준비를 했지요.
약을————검은 고약과 같은 아편을————맛이 쓰다는 아편을 물도 없이 먹으려 들었지요. 우리 둘은 아까 모양으로 가지런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달이 밝으니까 보이던 별들 중에 숨은 별이 많고 또 별들의 위치————우리에게 낯익은 북두칠성 자리도 변했을 것 아니야요. 이상한 생각이 나요. 우리가 벌판으로 헤매는 동안에 천지가 모두 변한 것 같아요. 사실 변하였지요. 그 변한 것이 우스워서 나는 껄껄 웃었지요 워낙 내가 웃음이 . 좀 헤푸지만 이때처럼 헤푸게 실컷 웃어 본 일은 없읍니다.
왜 웃느냐고 아내가 좀 성을 낸 듯이 묻기로, 「천지와 인생이 변하는 것이
우스워서 웃었소.」그랬지요. 그랬더니, 「천지와 인생은 변할는지 몰라도 내 마음은 안 변해요!」하고 소리를 지르겠지요. 퍽 분개했던 모양이야.』
하고 R는 그 아내를 보오. 『그럼 분개 안 해요? 남은 죽을 결심을 하고 발발 떨구 있는데 곁에서 껄껄거리고 웃으니, 어째 분하지가 않아요. 나는 분해서 달아나려고 했어요.』하고 부인은 아직도 분함이 남은 것같이 말하오.
『그래 달아나지 않았소?』하고 R는 부인이 벌떡 일어나서 비틀거리고 달아나는 흉내를 팔과 다리로 내고 나서, 『이래서 죽는 시간이 지체가 되었지요. 그래서 내가 빌고 달래고 해서 가까스로 안정을 시키고 나니 손에 쥐었던 아편이 땀에 푹 젖었겠지요. 내가 웃은 것은 죽기 전 한 번 천지와 인생을 웃어 버린 것인데 그렇게 야단이니…… 하하하하.』
R는 식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참 목도 마르기도 하더니. 입에는 침 한 방울 없고. 그러나 못물을 먹을 생각도 없고. 나중에는 말을 하려고 해도 혀가 안 돌아가겠지요.
이러는 동안에 달빛이 희미해지길래 웬 일인가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 해가 떠오릅니다그려. 어떻게 붉고 둥글고 씩씩한지.
「저 해 보오」하고 나는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구덩이에서 뛰어나왔지요.』하고 빙그레 웃소. R의 빙그레 웃는 양이 참 좋았소.
『내가 뛰어나오는 것을 보고 이이도 뿌시시 일어났지요. 그 해! 그 해의 새 빛을 받는 하늘과 땅의 빛! 나는 그것을 형용할 말을 가지지 못합니다. 다만 힘껏 소리치고 싶고 기운껏 달음박질치고 싶은 생각이 날 뿐이어요.
우리 삽시다, 죽지 말고 삽시다, 살아서 새 세상을 하나 만들어 봅시다, 이렇게 말하였지요. 하니까 이이가 처음에는 깜짝 놀라는 것 같아요. 그러나 마침내 아내도 죽을 뜻을 변하였지요. 그래서 남선생을 청하여다가 그 말씀을 여쭈었더니 남선생께서 고개를 끄덕끄덕하시고 우리 둘의 혼인 주례를 하셨지요. 그 후 십여 년에 우리는 밭갈고 아이 기르고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언제나 여기 새 민족이 생기고 누가 새 단군이 될는지요. 하하하하, 아하하하. 피곤하시겠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하고 R는 말을 끊소.
나는 R부처가 만류하는 것도 다 뿌리치고 여관으로 돌아왔소. R와 함께 달빛 속, 개짖는 소리 속을 지나서 아라사 사람의 조그마한 여관으로 돌아왔소. 여관 주인도 R을 아는 모양이어서 반갑게 인사하고 또 내게 대한 부탁도 하는 모양인가 보오. 은 내 방에 올라와서 내일 하루 R 지날 일도 이야기하고 또 남선생과 정임에게 관한 이야기도 하였으나, 나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들을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마음 없는 대답을 할 뿐이었소.
R이 돌아간 뒤에 나는 옷도 벗지 아니하고 침대에 드러누웠소. 페치카를 때기는 한 모양이나 방이 써늘하기 그지없소.
『그 두 별 무덤이 정말 R과 그 여학생과 두 사람이 영원히 달치 못할 꿈을 안은 채로 깨끗하게 죽어서 묻힌 무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다 하면 내일 한번 더 가서 보토라도 하고 오련마는.』하고 나는 R부처의 생활에 대하여 일종의 불만과 환멸을 느꼈소. 그리고 내가 정임을 여기나 시베리아나 어떤 곳으로 불러다가 만일 R과 같은 흉내를 낸다 하면, 하고 생각해 보고는 나는 진저리를 쳤소. 나는 내 머리 속에 다시 그러한 생각이 한 조각이라도 들어올 것을 두려워하였소. 급행을 기다리자면 또 사흘을 기다리지 아니하면 아니 되기로 나는 이튿날 새벽에 떠나는 구간차를 타고 F 역을 떠나 버렸소. R에게는 고맙다는 편지 한 장만을 써 놓고. 나는 R을 더 보기를 원치 아니하였소. 그것은 반드시 R을 죄인으로 보아서 그런것은 아니요마는 그저 나는 다시 R를 대면하기를 원치 아니한 것이요.
나는 차가 R의 집 앞을 지날 때에도 R의 집에 대하여서는 외면하였소. 이 모양으로 나는 흥안령을 넘고, 하일랄의 솔 밭을 지나서 마침내 이곳에 온것이요. 형! 나는 인제는 이 편지를 끝내오. 더 쓸 말도 없거니와 인제는 이것을 쓰기도 싫증이 났소.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할 때에는 바이칼에 물결이 흉용하더니 이 편지를 끝내는 지금에는 가의 가까운 물에는 얼음이 얼었소. 그리고 저 멀리 푸른 물이 늠실늠실 하얗게 눈 덮인 산 빛과 어울리게 되었소. 사흘이나 이어서 오던 눈이 밤새에 개고 오늘 아침에는 칼날 같은 바람이 눈을 날리고 있소. 나는 이 얼음 위로 걸어서 저 푸른 물 있는 곳까지 가고 싶은 유혹을 금할 수 없소. 더구나 이 편지도 다 쓰고 나니, 인제는 내가 이 세상에서 할 마지막 일까지 다 한 것 같소. 내가 이 앞에 어디로 가서 어찌 될는지는 나도 모르지마는 희미한 소원을 말하면 눈 덮인 시베리아의 인적 없는 삼림 지대로 한정없이 헤매다가 기운 진하는 곳에서 이 목숨을 마치고 싶소.
—————최 석 군은 「끝」이라는 글자를 썼다가 지워 버리고 딴 종이에다가 이런 말을 썼소—————.
다 쓰고 나니 이런 편지도 다 부질없는 일이요. 내가 이런 말을 한대야 세상이 믿어줄 리도 없지 않소. 말이란 소용없는 것이요. 내가 아무리 내 아내에게 말을 했어도 아니 믿었거든————내 아내도 내 말을 아니 믿었거든 하물며 세상이 내 말을 믿을 리가있소. 믿지 아니할 뿐 아니라 내 말 중에서 자기네 목적에 필요한 부분만은 믿고, 또 자기네 목적에 필요한 부분은 마음대로 고치고 뒤집고 보태고 할 것이니까, 나는 이 편지를 쓴 것이 한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인 줄을 깨달았소.
형이야 이 편지를 아니 보기로니 나를 안 믿겠소? 그 중에는 혹 형이 지금까지 모르던 자료도 없지 아니하니, 형만 혼자 보시고 형만 혼자 내 사정을 알아 주시면 다행이겠소. 세상에 한 믿는 친구를 가지는 것이 저마다 하는 일이겠소? 나는 이 쓸데 없는 편지를 몇 번이나 불살라 버리려고 하였으나 그래도 거기도 일종의 애착심이 생기고 미련이 생기는구려. 형 한 분이라도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구려. 내가 S 형무소에 입감해 있을 적에 형무소 벽에 죄수가 손톱으로 성명을 새긴 것을 보았소. 뒤에 물었더니 그것은 흔히 사형수가 하는 짓이라고. 사형수가 교수대에 끌려 나가기 바로 전에 흔히 손톱으로 담벼락이나 마룻바닥에 제 이름을 새기는 일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소. 내가 형에게 쓰는 이 편지도 그 심리와 비슷한 것일까요? 형! 나는 보통 사람보다는, 정보다는 지로, 상식보다는 이론으로, 이해보다는 의리로 살아 왔다고 자신하오. 이를테면 논리학적으로 윤리학적으로 살아온 것이라고 할까. 나는 엄격한 교사요, 교장이었소. 내게는 의지력과 이지력 밖에 없는 것 같았소. 그러한 생활을 수십 년 해 오지 아니하였소? 나는 이 앞에 몇 십 년을 더 살더라도 내 이 성격이나 생활 태도에는 변함이 없으리라고 자신하였소. 불혹지년이 지났으니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 아니요? 그런데 형! 참 이상한 일이 있소.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처해 있던 환경을 벗어나서 호호탕탕하게 넓은 세계에 알몸을 내어던짐을 당하니 내 마음 속에는 무서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는구려. 나는 이 말도 형에게 아니 하려고 생각하였소. 노여워하지 마시오, 내게까지도 숨기느냐고. 그런 것이 아니요, 형은커녕 나 자신에게까지도 숨기려고 하였던 것이요. 혹시 그런, 기다리지 아니 하였던 원, 그런 생각이 내 마음의 하늘에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아니하였던,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나는 스스로 놀라고 스스로 슬퍼하였소.
그래서 스스로 숨기기로 하였소. 그 숨긴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열정이요, 정의 불길이요, 정의 광풍이요, 정의 물결이오. 만일 내 의식이 세계를 평화로운 풀 있고, 꽃 있고, 나무 있는 벌판이라고 하면 거기 난데없는 미친 짐승들이 불을 뿜고 소리를 지르고 싸우고, 영각을 하고 날쳐서 이 동산의 평화의 , 화초를 다 짓밟아 버리고마는 그러한 모양과 같소. 형! 그 이상야릇한 짐승들이 여태껏, 사십년 간을 어느 구석에 숨어 있었소? 그러다가 인제 뛰어나와 각각 제 권리를 주장하오? 지금 내 가슴속은 끓소. 내 몸은 바짝 여위었소. 그것은 생리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나 타는 것이요, 연소하는 것이요. 그래서 다만 내 몸의 지방만이 타는것이 아니라, 골수까지 타고, 몸이 탈뿐이 아니라 생명 그 물건이 타고 있는 것이요.
그러면 어찌할까.
지위, 명성, 습관, 시대 사조 등등으로 일생에 눌리고 눌렸던 내 자아의 일부분이 혁명을 일으킨 것이요? 한 번도 자유로 권세를 부려 보지 못한 본능과 감정들이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날뛰어 보려는 것이요. 이것이 선이오? 악이오? 그들은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여기고 신성하다고 여기던 모든 권위를 모조리 둘러엎으려고 드오. 그러나 형! 나는 도저히 이 혁명을 용인할 수가 없소. 나는 죽기까지 버티기로 결정을 하였소. 내 속에서 두 세력이 싸우다가 싸우다가 승부가 결정이 못 된다면 나는 승부의 결정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살기를 그만두려오. 나는 눈 덮인 삼림 속으로 들어가려오. 나는 V라는 대삼림 지대가 어디인 줄도 알고 거기를 가려면 어느 정거장에서 내릴 것도 다 알아 놓았소. 만일 단순히 죽는다 하면 구태여 멀리 찾아갈 필요도 없지마는 그래도 나 혼자로는 내 사상과 감정의 청산을 하고 싶소. 살 수 있는 날까지 세상을 떠난 곳에서 살다가 완전한 해결을 얻는 날 나는 혹은 승리의, 혹은 패배의 종막을 닫칠 것이요. 만일 해결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치면 그만이지요.나는 이 붓을 놓기 전에 어젯밤에 꾼 꿈 이야기 하나는 하려오. 꿈이 하도 수상해서 마치 내 전도에 대한 신의 계시와도 같기로 하는 말이오.
그 꿈은 이러하였소—————.
내가 꽁이깨(꼬이까라는 아라사말로 침대라는 말이 조선 동포의 입으로 변한
말이오.)짐을 지고 삽을 메고 눈이 덮인 삼림 속을 혼자 걸었소. 이 꽁이깨 짐이란것은 금점꾼들이 그 여행 중에 소용품, 마른 빵, 소금, 내복 등속을 침대 매트리스에 넣어서 지고 다니는 것이요. 이 짐하고 삽 한 개, 도끼 한 개, 그것이 시베리아로 금을 찾아 헤매는 조선 동포들의 행색이오. 내가 이르쿠트스크에서 이러한 동포를 만났던 것이 꿈으로 되어 나온 모양이오.
나는 꿈에는 세상을 다 잊어버린, 아주 깨끗하고 침착한 사람으로 이 꽁이깨 짐을 지고 삽을 메고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으나 땅은 눈빛으로 희고, 하늘은 구름빛으로 회색인 삼림 지대를 허덕허덕 걸었소. 길도 없는 데를, 인적도 없는 데를. 꿈에도 내 몸은 퍽 피곤해서 쉴 자리를 찾는 마음이었소.
나는 마침내 어떤 언덕 밑 한 군데를 골랐소. 그리고 상시에 이야기에서 들은 대로 삽으로 내가 누울 자리만한 눈을 치고, 그리고는 도끼로 곁에 선 나무 몇 개를 찍어 누이고 거기다가 불을 놓고 그 불김에 녹은 땅을 두어 자나 파내고 그 속에 드러누웠소. 훈훈한 것이 아주 편안하였소. 하늘에는 별이 반짝거렸소. F 역에서 보던 바와 같이 큰 별 작은 별도 보이고 평시에 보지 못하던 붉은 별, 푸른 별들도 보였소. 나는 이 이상한 하늘, 이상한 별들이 있는 하늘을 보고 드러누워 있노라니까 문득 어디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소. 퉁퉁퉁퉁 우루루루…… 나는 벌떡 일어나려 하였으나 몸이 천근이나 되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소. 가까스로 고개를 조금 들고 보니 뿔이 길다랗고 눈이 불같이 붉은 사슴의 떼가 무엇에 놀랐는지 껑충껑충 뛰어 지나가오. 이것은 아마 크로프트킨의 「상호 부조론」속에 말한 시베리아의 사슴의 떼가 꿈이되어 나온 모양이오. 그러더니 그 사슴의 떼가 다 지나간 뒤에, 그 사슴의 떼가 오던 방향으로서 정임이가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스르륵 하고 미끄러져 오오. 마치 인형을 밀어 주는 것같이.
『정임아!』하고 나는 소리를 치고 몸을 일으키려 하였소.
정임의 모양은 나를 잠간 보고는 미끄러지는 듯이 흘러가 버리오.
나는 정임아, 정임아를 부르고 팔다리를 부둥거렸소. 그러다가 마침내 내 몸이 번쩍 일으켜짐을 깨달았소. 나는 정임의 뒤를 따랐소.
나는 눈 위로 삼림 속으로 정임의 그림자를 따랐소. 보일 듯 안 보일 듯, 잡힐 듯 안 잡힐 듯, 나는 무거운 다리를 끌고 정임을 따랐소.
정임은 이 추운 날이언만 눈과 같이 흰 옷을 입었소. 그 옷은 옛날 로마 여인의 옷과 같이 바람결에 펄렁거렸소.
『오지 마세요. 저를 따라오지 못하십니다.』하고 정임은 눈보라 속에 가리워 버리고 말았소. 암만 불러도 대답이 없고 눈보라가 다 지나간 뒤에도 붉은 별, 푸른 별과 뿔 긴 사슴의 떼뿐이오. 정임은 보이지 아니하였소. 나는 미칠 듯이 정임을 찾고 부르다가 잠을 깨었소. 꿈은 이것뿐이오. 꿈을 깨어서 창 밖을 바라보니 얼음과 눈에 덮인 바이칼호 위에는 새벽의 겨울 달이 비치어 있었소. 저 멀리 검푸르게 보이는 것이 채 얼어붙지 아니한 물이겠지요. 오늘 밤에 바람이 없고 기온이 내리면 그것마저 얼어붙을는지 모르지요. 벌써 살얼음이 잡혔는지도 모르지요. 아아, 그 속은 얼마나 깊을까. 나는 바이칼의 물속이 관심이 되어서 못 견디겠소. 형! 나는 자백하지 아니할 수 없소. 이 꿈은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설명한 것이라고. 그러나 형! 나는 이것을 부정하려오. 굳세게 부정하려오. 나는 이 꿈을 부정하려오. 억지로라도 부정하려오. 나는 결코 내 속에 일어난 혁명을 용인하지 아니하려오 나는 그것을 혁명으로 . 인정하지 아니하려오. 아니요! 아니요! 그것은 반란이오! 내 인격의 통일에 대한 반란이오. 단연코 무단적으로 진정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반란이오. 보시오. 나는 여기 서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에 형이 광야에 구르는 내 시체나 해골을 본다든지, 또는 무슨 인연으로 내 무덤을 발견하는 날이 있다고 하면 그때에 형은 내가 이 모든 반란을 진정한 개선의
군주로 죽은 것을 알아주시오. 인제 바이칼에 겨울의 석양이 비치었소. 눈을 인 나지막한 산들이 지는 햇빛에 자줏빛을 발하고 있소. 극히 깨끗하고 싸늘한 광경이오. 아디유!
이 편지를 우편에 부치고는 나는 최후의 방랑의 길을 떠나오. 찾을 수도 없고, 편지 받을 수도 없는 곳으로. 부디 평안히 계시오. 일 많이 하시오. 부인께 문안 드리오. 내 가족과 정임의 일 맡기오. 아디유!
—————이것으로 최 석 군의 편지는 끝났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울었다. 이것이 일편의 소설이라 하더라도 슬픈 일이어든 하물며,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친구의 일임에야.
이 편지를 받고 나는 곧 최 석 군의 집을 찾았다. 주인을 잃은 이 집에서는
아이들이 마당에서 떠들고 있었다.
『삼청동 아자씨 오셨수. 어머니, 삼청동 아자씨.』하고 최 석 군의 작은딸이 나를 보고 뛰어 들어갔다.
최 석의 부인이 나와 나를 맞았다. 부인은 머리도 빗지 아니하고, 얼굴에는 조금도 화장을 아니하고, 매무시도 흘러내릴 지경으로 정돈되지 못하였다. 일주일이나 못 만난 동안에 부인의 모양은 더욱 초췌하였다.
『노석헌테서 무슨 기별이나 있습니까?』하고 나는 무슨 말로 말을 시작할지 몰라서 이런 말을 하였다.
『아니요. 왜 그이가 집에 편지하나요?』하고 부인은 성난 빛을 보이며,
『집을 떠난 지가 근 사십 일이 되건만 엽서 한 장 있나요. 집안 식구가 다 죽기로 눈이나 깜짝할 인가요. 그저 정임이헌테만 미쳐서 죽을지 살지를 모르지요.』하고 울먹울먹한다.
『잘못 아십니다. 부인께서 노석의 마음을 잘못 아십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하고 나는 확신 있는 듯이 말을 시작하였다.
『노석의 생각을 부인께서 오해하신 줄은 벌써부터 알았지마는 오늘 노석의 편지를 받아보고 더욱 분명히 알았읍니다.』하고 나는 부인의 표정의 변화를 엿보았다.
『편지가 왔어요?』하고 부인은 놀라면서,
『지금 어디 있어요? 일본 있지요?』하고 질투의 불길을 눈으로 토하였다.
『일본이 아닙니다. 노석은 지금 아라사에 있읍니다.』
『아라사요?』하고 부인은 놀라는 빛을 보이더니,
『그럼 정임이를 데리고 아주 아라사로 가께오찌를 하였군요.』하고 히스테리칼한 웃음을 보이고는 몸을 한 번 떨었다.
부인은 남편과 정임의 관계를 말할 때마다 이렇게 경련적인 웃음을 웃고 몸을 떠는것이 버릇이었다.
『아닙니다. 노석은 혼자 가 있읍니다. 그렇게 오해를 마세요.』하고 나는 보에 싼 최 석의 편지를 내어서 부인의 앞으로 밀어 놓으며,
『이것을 보시면 다 아실 줄 압니다. 어쨌으나 노석은 결코 정임이를 데리고 간것이 아니요, 도리어 정임이를 멀리 떠나서 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대 문제가 있읍니다. 노석은 이 편지를 보면 죽을 결심을 한 모양입니다.』
하고 부인의 주의를 질투로부터 그 남편에게 대한 동정에 끌어 보려 하였다.
『흥. 왜요? 시체 정사를 하나요? 좋겠읍니다. 머리가 허연 것이 딸자식 같은 계집애허구 정사를 한다면 그 꼴 좋겠읍니다. 죽으라지요. 죽으래요. 죽는 것이낫지요. 그리구 살아서 무엇 해요?』
내 뜻은 틀려 버렸다. 부인의 표정과 말에서는 더욱더욱 독한 질투의 안개와 싸늘한 얼음 가루가 날았다. 나는 부인의 이 태도에 반감을 느꼈다. 아무리 질투의 감정이 강하다 하기로, 사람의 생명이—————제 남편의 생명이 위태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제 질투의 감정에만 충실하려 하는 그 태도가 불쾌하였다.
그래서 나는,『나는 그만큼 말씀해 드렸으니 더 할 말씀은 없읍니다. 아무려나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이것을 읽어 보세요.』하고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불쾌하기 그지없는 날이다. 최 석의 태도까지도 불쾌하다. 달아나긴 왜 달아나? 죽기는 왜 죽어? 못난 것! 기운 없는 것! 하고 나는 최 석이가 곁에 섰기나 한 것처럼 눈을 흘기고 중얼거렸다. 최 석의 말대로 최 석의 부인은 악한 사람이 아니요, 그저 보통인 여성일는지 모른다. 그렇다 하면 여자의 마음이란 너무도 질투의 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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