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279

이광수-유정, 3 T 대학 병원 S 내과 X 호 병실이 정임의 병실이라는 것은 아까 키 큰 여학생 김에게서 들었소. 어쩌면 김이 나를 병원까지 안내해 주지 아니하였을까. 어쩌면 김의 태도가 그렇게 냉랭하였을까 하면서 나는 X호실을 찾았소. X호실이라는 것은 결핵 병실인 것을 발견하였소. 침침한 복도로 다니는 의사, 간호부들이 가제 마스크로 입과 코를 싸매고 다니는 것이 마치 죽음의 나라와 같았소. 어디나 마찬가지인 심술궂게 생긴 「쓰끼소이」노파들의 오락가락하는 양이 더구나 이 광경을 음산하게 하였소. 『남 정임은?』하고 나는 간호부실 앞에서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물었소. 병원에서는 간호부가 제일 세도 있는 벼슬인 줄을 알기 때문이오. 『X호실.』하고 뚱뚱한 간호부가 나를 힐끗 보며 냉담하게 대답하더니, 『남 정임 씨는 면.. 2011. 10. 29.
이광수-유정, 4 『영, 도무지 글을 함부로 쓰는 계집애!』하고 나는 좀 불쾌하여서 일기책을 주먹으로 탁 쳤소. 그러나 다음 순간에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림을 금할 수 없었소. 왜? 나는 기억하오. 정임의 말과 같이 우리가 원산을 떠나려던 전날,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정임, 순임, 두 애를 데리고 우리가 있는 숙소에서 꽤 먼 데 있는 두 아이 선생집에 작별을 갔었소. 선생 집에 가서 이야기도 하고 수박도 먹고 놀다가, 순임이년은 선생 집에 놀러 왔던 제 동무하고 시내로 놀러 나간다고 가 버리고, (뒤에 아니까 순임이년은 그 동무의 오라비와 함께 활동사진 구경을 갔더라오.) 암만 기다려도 돌아오지를 아니하기로 할 수 없이 정임이만 데리고 우리 숙소로 돌아왔소. 이날은 정임의 일기에 있는 모양으로 동남풍이 많이 불고 하.. 2011. 10. 29.
이광수-유정, 5 『학교는 사직해 버렸다.』 『네에? 왜요?』하고 정임은 교의에 얹었던 손을 떼어 가지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오. 『다른 일을 좀 해볼 양으로.』 『네에.』하고 정임은 더 파서 묻기가 미안한 모양이나 그 눈에는 의심과 불안이 꽉 찬 것이 분명하였소. 그러나 나는 지금 정임의 마음을 괴롭게 할 말을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을 생각하였소. 그러나 정임에게 가장 놀랍지 아니하게 가장 정임이가 받을 타격의 분량이 적도록 그 동안 일어난 사정을 말하지 아니치 못할 필요도 있는 것은 사실이오. 그 일은 정임에게도 관계가 되는 일이니까. 『나는 어디 여행을 좀 하고 올란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너를 한 번 더 보고 가려고 왔다. 몸도 성하지 못한 것을 혼자 두고 가서 안 되었지마는 내가 있대야 별수 없고 네 치료비는 .. 2011. 10. 29.
이광수-유정, 6 그러나 다음 순간 또 두어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소. 『이에스.』하고 나는 대답하고 문을 바라보았소. 문이 열렸소. 들어오는 이는 정임이었소. 『웬 일이냐?』하고 나는 엄숙한 태도를 지었소. 그것으로 일초의 일천분지 일이라도 다시 한 번 보고 싶던 정임을 보고 기쁨을 캄플라지한 것이요. 정임은 서슴지 않고 내 뒤에 와서 내 교의에 몸을 기대며, 『암만해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만 같아서, 다시 뵈올 기약은 없는 것만 같아서 가다가 도로 왔읍니다. 한 번만 더 뵙고 갈 양으로요. 그래 도로 와서도 들어올까 말까 하고 주저주저하다가 이것이 마지막인데 하고 용기를 내어서 들어왔읍니다. 내일 저를 보시고 가신다는 것이 부러 하신 말씀만 같고, 마지막 뵈옵고 뵈온대도‒‒‒‒ 그래도 한 번 더 뵈옵기만 해도…….. 2011. 10. 29.
이광수-유정,7 〈아아 저 작은 별!〉 그것도 지평선에 닿았소. 〈아아 저 작은 별. 저것마저 넘어가면 나는 어찌하나?〉 인제는 어둡소. 광야의 황혼은 명색뿐이요, 순식간이요, 해지자 신비하다고 할 만한 극히 짧은 동안에 아름다운 황혼을 조금 보이고는 곧 칠과 같은 암흑이오. 호수의 물만이 어디서 은빛을 받았는지 뿌옇게 나만이 유일한 존재다, 나만이 유일한 빛이다 하는 듯이 인제는 수은빛이 아니라 남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오. 나는 그중 빛을 많이 받은, 그중 환해 보이는 호수면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좀더 맑은 호수면을 찾는 동안에 이 광야의 어둠은 더욱더욱 짙어지오. 나는 어떤 조그마한 호숫가에 펄썩 앉았소. 내 앞에는 짙은 남빛의 수면에 조그마한 거울만한 밝은 데가 있소. .. 2011. 10. 29.
이광수-유정, 8 스러지자는 우리는 철학자도 …… 시인도 아니지마는 우리들의 환경이 우리 둘에게 그러한 생각을 넣어 준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것을 저이가 물끄러미 보고 있더니 자기도 내곁에 들어와 눕겠지요. 그런 뒤에는 황혼에 남은 빛도 다 스러지고 아주 캄캄한 암흑 세계가 되어버렸지요. 하늘에 어떻게 그렇게 별이 많은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참 별이 많아요. 우주란 참 커요. 그런데 이 끝없이 큰 우주에 한없이 많은 별들이 다 제자리를 지키고 제 길을 지켜서 서로 부딪지도 아니하고 끝없이 긴 시간에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주에는 어떤 주재하는 뜻, 섭리하는 뜻이 있다 하는 생각이 나겠지요. 나도 예수교인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마는 이때처럼 하나님이라 할까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 2011. 10. 29.
이광수-유정, 9 설사 남편 되는 최석의 사랑이 아내로부터 정임에게로 옮아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질투로 회복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미 사랑이 . 떠난 남편을 네 마음대로 가거라 하고 자발적으로 내어버릴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 할 사정이 있다고 하면 모르는 체하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이것은 우리네 남자의 이론이요, 여자로는 이런 경우에 질투라는 반응밖에 없도록 생긴 것일까.—————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계가 아홉시를 친다. 남대문 밖 정거장을 떠나는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린다. 나는 만주를 생각하고, 시베리아를 생각하고 최 석을 생각하였다. 마음으로는 정임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을 발표할 수 없어서 시베리아의 눈 덮인 삼림 속으로 방황하는 최 석의 모양이 최 석의 꿈 이야기에 있는 대로 눈앞에 .. 2011. 10. 29.
이광수-유정, 10 며칠 후에 순임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것은 하르빈에서 부친 것이었다——. 『하르빈을 오늘 떠납니다. 하르빈에 와서 아버지 친구 되시는 R 소장을 만나 뵈옵고 아버지 일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둘이서 찾아 떠났다는 말씀을 하였더니 R 소장이 대단히 동정하여서 여행권도 준비해 주시기로 저희는 아버지를 찾아서 오늘 오후 모스크바 가는 급행으로 떠납니다. 가다가 F 역에 내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정임의 건강이 대단히 좋지 못합니다. 일기가 갑자기 추워지는 관계인지 정임의 신열이 오후면 삼십팔 도를 넘고 기침도 대단합니다. 저는 염려가 되어서 정임더러 하르빈에서 입원하여, 조리를 하라고 권하였지마는 도무지 듣지를 아니합니다. 어디까지든지 가는 대로 가다가 더 못 가게 되면 그 곳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 2011. 10. 29.
이광수-유정, 11 ◀이광수의 '유정' 첫 페이지 부터 보기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이 생각을 죽여야 한다. 다시 거두를 못 하도록 목숨을 끊어 버려야 한다. 이것을 나는 원한다. 원하지마는 내게는 그 힘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종교를 생각하여 본다. 철학을 생각하여 본다. 인류를 생각하여 본다. 나라를 생각하여 본다. 이것을 가지고 내 애욕과 바꾸려고 애써 본다. 그렇지마는 내게 그러한 힘이 없다. 나는 완전히 헬플리스함을 깨닫는다. 아아 나는 어찌할꼬? 나는 못생긴 사람이다. 그까짓 것을 못 이겨? 그까짓 것을 못 이겨? 나는 예수의 광야에서의 유혹을 생각한다. 천하를 주마 하는 유혹을 생각한다. 나는 실달라 태자가 왕궁을 버리고 나온 것을 생각하고, 또 스토아 철학자의 의지.. 2011. 1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