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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유정, 11

by 핫PD 2011.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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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유정' 첫 페이지 부터 보기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이 생각을 죽여야 한다. 다시 거두를 못 하도록 목숨을 끊어 버려야 한다. 이것을 나는 원한다. 원하지마는 내게는 그 힘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종교를 생각하여 본다. 철학을 생각하여 본다. 인류를 생각하여 본다. 나라를 생각하여 본다. 이것을 가지고 내 애욕과 바꾸려고 애써 본다. 그렇지마는 내게 그러한 힘이 없다. 나는 완전히 헬플리스함을 깨닫는다.
아아 나는 어찌할꼬?
나는 못생긴 사람이다.
그까짓 것을 못 이겨?
그까짓 것을 못 이겨?

나는 예수의 광야에서의 유혹을 생각한다.
천하를 주마 하는 유혹을 생각한다.
나는
실달라 태자가 왕궁을 버리고 나온 것을 생각하고, 또 스토아 철학자의 의지력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생각으로도 이 생각을 이길 수가 없는 것 같다. 나는 혁명가를 생각하였다. 모든 것————사랑도 목숨도 다 헌신짝같이 집어던지고 피 흐르는 마당으로 뛰어나가는 용사를 생각하였다. 나는 이 끝 없는 삼림 속으로 혁명의 용사 모양으로 달음박질 치다가 기운이 진한 곳에서 죽어 버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도 이 생각은 따르지 아니할까. 나는 지금 곧 죽어 버릴까. 나는 육혈포를 손에 들어 보았다. 이 방아쇠를 한 번만 튕기면 내 생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 되면 모든 이 마음의 움직임은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아 하나님이시여, 힘을 주시옵소서. 천하를 이기는 힘보다도 나 자신을 이기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눈에 의롭고 깨끗한 사람으로 이 일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나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버리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힘을 주시지 아니하시었다.
나를 이 비참한 자리에서 썩어져 죽게 하시었다.』
최 석은 어떤 날 일기에 또 이런 것도 썼다. 그것은 예전 내게 보낸 편지에 있던 꿈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러하다 ————.
『오늘 밤은 달이 좋다. 시베리아의 겨울 해는 참 못생긴 사람과도 같이 기운이 없지마는 하얀 땅, 검푸른 하늘에 저쪽 지평선을 향하고 흘러가는 반달은 참으로 맑음 그것이었다.
나는 평생 처음 시 비슷한 것을 지었다 ————
임과 이별하던 날 밤에는 남쪽 나라에 바람비가 쳤네
임 타신 자동차의 뒷불의———— 빨간 뒷불이 빗발에 찢겼네
임 떠나 혼자 헤매는 시베리아의 오늘 밤에는,
지려는 쪽달이 눈 덮인 삼림에 걸렸구나.
아아 저 쪽달이여,
억지로 반을 갈겨진 것도 같아라.
아아 저 쪽달이여!
잃어진 짝을 찾아
차디찬 허공 속을 영원히 헤매는 것도 같구나.
나도 저 달과 같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무궁한 시간과 공간에서 헤매는 것만 같다.


에익. 내가 왜 이리 약한가. 어찌하여 크나큰 많은 일을 돌아보지 못하고 요만한 애욕의 포로가 되는가. 그러나 나는 차마 그 달을 버리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센티멘털하게 되었는고. 내 쇠 같은 의지력이 어디로 갔는고. 내 누를 수 없는 자존심이 어디로 갔는고. 나는 마치 유모의 손에 달린 젖먹이와도 같다. 내 일신은 도시 애욕 덩어리로 화해 버린 것 같다.
이른바 사랑————사랑이란 말은 종교적 의미인 것 이외에도 입에 담기도 싫어하던 말이다 ————이란 것은 내 의지력과 자존심을 녹여 버렸는가. 또 이 부자연한 고독의 생활이 나를 이렇게 ———— 내 인격을 이렇게 파괴하였는가. 그렇지 아니하면 내 자존심이라는 것이나, 의지력이라는 것이나, 인격이라는 것이 모두 세상의 습관과 사조에 휩쓸리던 것인가. 남들이 그러니까 ———— 남들이 옳다니까 ————남들이 무서우니까 이 애욕의 무덤에 회를 발랐던 것인가. 그러다가 고독과 반성의 기회를 얻으매 모든 회칠과 가면을 떼어 버리고 빨가벗은 애욕의 뭉텅이가 나온 것인가. 그렇다 하면, 이것이 참된 나인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대로의 나인가. 가슴에 타오르는 애욕의 불길 이 불길이 곧 내 영혼의 불길인가. 어쩌면 그 모든 높은 이상들 ———— 인류에 대한, 민족에 대한, 도덕에 대한, 신앙에 대한 그 높은 이상들이 이렇게도 만만하게 마치 바람에 불리는 재 모양으로 자취도 없이 흩어져 버리고 말까. 그리고 그 뒤에는 평소에 그렇게도 미워하고 천히 여기던 애욕의 검은 흙만 남고 말까.


아아 저 눈 덮인 땅이여, 차고 맑은 달이여, 허공이여! 나는 너희들을
부러워하노라. 불교도들의 해탈이라는 것이 이러한 애욕이 불붙는 지옥에서 눈과 같이 싸늘하고 허공과 같이 빈 곳으로 들어감을 이름인가.
석가의 팔 년 간 설산 고행이 이 애욕의 뿌리를 끊으려 함이라 하고 예수의 사십 일 광야의 고행과 겟세마네의 고민도 이 애욕의 뿌리 때문이었던가.
그러나 그것을 이기어 낸 사람이 천지 개벽 이래에 몇몇이나 되었는고? 나 같은것이 그 중에 한 사람 되기를 바랄 수가 있을까. 나 같아서는 마침내 이 애욕의 불길에 다 타서 재가 되어 버릴 것만 같다. 아아 어떻게나 힘있고 무서운 불길인고.』이러한 고민의 자백도 있었다.
또 어떤 날 일기에는 최 석은 이런 말을 썼다.
『나는 단연히 동경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그 이튿날은,
『나는 단연히 동경으로 돌아가리란 결심을 한 것을 굳세게 취소한다. 나는 이러한 결심을 하는 나 자신을 굳세게 부인한다.』
또 이런 말도 있다 ————.
『나는 정임을 시베리아로 부르련다.』
또 그 다음에는,
『아아 나는 하루바삐 죽어야 한다. 이 목숨을 연장하였다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는지 모른다. 나는 깨끗하게 나를 이기는 도덕적 인격으로 이 일생을 마쳐야 한다. 이 밖에 내 사업이 무엇이냐.』


또 어떤 곳에는,
『아아 무서운 하룻밤이었다. 나는 지난 하룻밤을 누를 수 없는 애욕의 불길에 탔다. 나는 내 주먹으로 내 가슴을 두드리고 머리를 벽에 부딪쳤다. 나는 주먹으로 담벼락을 두드려 손등이 터져서 피가 흘렀다. 나는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는 수없이 발을 굴렀다. 나는 이 무서운 유혹을 이기려고 내 몸을 아프게 하였다. 나는 견디다 못하여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밖에는 달이 있고 눈이 있었다. 그러나 눈은 핏빛이요, 달은 찌그러진 것 같았다. 나는 눈 속으로 달음박질쳤다. 달을 따라서 엎드러지며 자빠지며 달음질쳤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미친 사람 같았다.』
그러고는 어디까지 갔다가 어느 때에 어떠한 심경의 변화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는 말은 쓰이지 아니하였으나 최 석의 병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열이 나고 기침이 난다. 가슴이 아프다. 이것이 폐염이 되어서 혼자 깨끗하게 이 생명을 마치게 하여 주소서 하고 빈다. 나는 오늘부터 먹고 마시기를 그치련다.』이러한 말을 썼다.
그러고는,
『정임, 정임, 정임, 정임.』하고 정임의 이름을 수없이 쓴 것도 있고, 어떤 데는,
『Overcome! Overcome!』하고 영어로 쓴 것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는 죽음과 대면하였다. 사흘째 굶고 앓은 오늘에 나는 극히 맑고 침착한
정신으로 죽음과 대면하였다. 죽음은 검은 옷을 입었으나 그 얼굴에는 자비의 표정이 있었다. 죽음은 곧 검은 옷을 입은 구원의 손이었다. 죽음은 아름다운 그림자였다. 죽음은 반가운 애인이요, 결코 무서운 원수가 아니었다. 나는 죽음의 손을 잡노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품에 안기노라. 아아.』
이것을 쓴 뒤에는 다시는 일기가 없었다. 이것으로 최 석이가 그 동안 지난 일을 ————적어도 심리적 변화만은 대강 추측할 수가 있었다.
다행히 최 석의 병은 점점 돌리는 듯하였다. 열도 내리고 식은땀도 덜 흘렸다. 안 먹는다고 고집하던 음식도 먹기를 시작하였다. 정임에게로 갔던 노파에게서는 정임도 열이 내리고 일어나 앉을 만하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노파의 편지를 최 석에게 읽어 주었다. 최 석은 그 편지를 듣고 매우 흥분하는
모양이었으나 곧 안심하는 빛을 보였다. 나는 최 석의 병이 돌리는 것을 보고 정임을 찾아볼 양으로 떠나려 하였으나 순임이가 듣지 아니하였다. 혼자서 앓는 아버지를 맡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파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나는 최 석이가 먹을 음식도 살겸 우편국에도 들를 겸 시가까지 가기로 하고 이곳
온지 일주일이나 지나서 처음으로 산에서 나왔다. 나는 일크트스크에 가서 최 석을 위하여 약품과 먹을 것을 사고 또 순임을 위해서도 먹을 것과 의복과 또 하모니카와 손풍금도 사 가지고 정거장에 나와서 돌아올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순후해 보이는 아라사 사람들이 정거장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는 최 석이가 병이 좀 나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또 최 석과 정임의 장래가 어찌될까 하는 것도 생각하면서 부페(식당)에서 뜨거운 차이(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때에 밖을 바라보고 있던 내 눈은 문득 이상한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 노파가 이리로 향하고 걸어오는 것인데 그 노파와 팔을 걸은 젊은 여자가 있는 것이다. 머리를 검은 수건으로 싸매고 입과 코를 가리웠으니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혹은 정임이나 아닌가 할 수밖에 없었다. 정임이가 몸만 기동하게 되면 최 석을 보러 올
것은 정임의 열정적인 성격으로 보아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반쯤 먹던 차를 놓고 부페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 미시스 체스터필드?』하고 나는 노파 앞에 손을 내어밀었다. 노파는 체스터필드라는 미국 남편의 성을 따라서 부르는 것을 기억하였다.
『선생님!』하는 것은 정임이었다. 그 소리만은 변치 아니하였다. 나는 검은 장갑을 낀 정임의 손을 잡았다. 나는 여러 말 아니하고 노파와 정임을 부페로 끌고 들어왔다. 늙은 부페 보이는 번쩍번쩍하는 사모왈에서 차 두 잔을 따라다가 노파와 정임의 앞에 놓았다.

노파는 어린애에게 하는 모양으로 정임의 수건을 벗겨 주었다. 그 속에서는
해쓱하게 여윈 정임의 얼굴이 나왔다. 두 볼에 불그레하게 홍훈이 도는 것도 병 때문인가.
『어때? 신열은 없나?』하고 나는 정임에게 물었다.
『괜찮아요.』하고 정임은 웃으며,
『최 선생님께서는 어떠세요?』하고 묻는다.
『좀 나으신 모양이야. 그래서 나는 오늘 정임을 좀 보러 가려고 했는데 이
체스터필드 부인께서 아니 오시면 순임이가 혼자 있을 수가 없다고 해서, 그래 이렇게 최 선생 자실 것을 사 가지고 가는 길이야.』하고 말을 하면서도 나는 정임의 눈과 입과 목에서 그의 병과 마음을 알아보려고 애를 썼다.
중병을 앓은 깐 해서는 한 달 전 남대문서 볼 때보다 얼마 더 초췌한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네에.』하고 정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안경알에는 이슬이 맺혔다.
『선생님 댁은 다 안녕하셔요?』
『응, 내가 떠날 때에는 괜찮았어.』
『최 선생님 댁도?』
『응.』
『선생님 퍽은 애를 쓰셨어요.』하고 정임은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웃음을 웃는다. 말을 모르는 노파는 우리가 하는 말을 눈치나 채려는 듯이 멀거니 보고 있다가 서투른 영어로, 아직 미스 남은 신열이 있답니다 『. 그래도 가 본다고, 죽어도 가 본다고 내 말을 안 듣고 따라왔지요.』하고 정임에게 애정 있는 눈흘김을 주며,
『유 노티 차일드(말썽꾼이).』하고 입을 씰룩하며 정임을 안경 위로 본다.
『니체워, 마뚜슈까(괜찮아요, 어머니).』하고 정임은 노파를 보고 웃었다. 정임의 서양 사람에게 대한 행동은 서양식으로 째었다고 생각하였다.


정임은 도리어 유쾌한 빛을 보였다. 다만 그의 붉은빛 띤 눈과 마른 입술이 그의 몸에 열이 있음을 보였다. 나는 그의 손끝과 발끝이 싸늘하게 얼었을 것을 상상하였다. 마침 이 날은 날이 온화하였다. 엷은 햇빛도 오늘은 두꺼워진 듯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F 역에서 내려서 썰매 하나를 얻어 타고 산으로 향하였다. 산도 아니지마는 산 있는 나라에서 살던 우리는 최 석이가 사는 곳을 산이라고 부르는 습관을 지었다. 삼림이 있으니 산같이 생각된 까닭이었다.
노파가 오른편 끝에 앉고, 가운데다가 정임을 앉히고 왼편 끝에 내가 앉았다.
쩟쩟쩟 하는 소리에 말은 달리기 시작하였다. 한 필은 키 큰 말이요, 한 필은 키가 작은 말인데 키 큰 말은 아마 늙은 군마 퇴물인가 싶게 허우대는 좋으나 몸이 여위고 털에는 윤이 없었다. 조금만 올라가는 길이 되어도 고개를 숙이고 애를 썼다. 작은 말은 까불어서 가끔 채찍으로 얻어맞았다.
『아가 삼림이 좋아요.』하고 정임은 정말 기쁜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좋아?』하고 나는 멋없이 대꾸하고 나서, 후회되는 듯이,
『밤낮 삼림 속에서만 사니까 지리한데.』하는 말을 붙였다.
『저는 저 눈 있는 삼림 속으로 한정 없이 가고 싶어요. 그러나 저는 인제 기운이 없으니깐 웬걸 그래 보겠어요.』하고 한숨을 쉬었다.
『왜 그런 소릴 해. 인제 나을걸.』하고 나는 정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슬픈 눈물 방울이나 찾으려는 듯이.
제가 지금도 열이 삼십팔 도가 『넘습니다.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니까 아마 더 올라가나 봐요.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 하루야 못 살라고요. 오늘 하루만 살면 괜찮아요. 최 선생님만 한 번 뵙고 죽으면 괜찮아요.』
『왜 그런 소릴 해?』하고 나는 책망하는 듯이 어성을 높였다.
정임은 기침을 시작하였다. 한바탕 기침을 하고는 기운이 진한 듯이 노파에게 기대며 조선말로,


『추워요.』하였다. 이 여행이 어떻게 정임의 병에 좋지 못할 것은 의사가 아닌 나로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로는 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외투를 벗어서 정임에게 입혀 주고 노파는 정임을 안아서 몸이 덜 흔들리도록 또 춥지 않도록 하였다. 나는 정임의 모양을 애처로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밖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얼마를 지나서 정임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일어나며,
『인제 몸이 좀 녹았읍니다. 선생님 추우시겠어요. 이 외투 입으셔요.』하고 그의 입만 웃는 웃음을 웃었다.
『난 춥지 않아. 어서 입고 있어.』하고 나는 정임이가 외투를 벗는 것을 막았다. 정임은 더 고집하려고도 아니하고,
『선생님 시베리아의 삼림은 참 좋아요. 눈 덮인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이 인적 없고 자유로운 삼림 속으로 헤매어 보고 싶어요.』하고 아까 하던 것과 같은 말을 또 하였다.
『며칠 잘 정양하여서, 날이나 따뜻하거든 한 번 산보나 해 보지.』
하고 나는 정임의 말뜻이 다른 데 있는 줄을 알면서도 부러 평범하게 대답하였다. 정임은 대답이 없었다.
『여기서도 아직 멀어요?』하고 정임은 몸이 흔들리는 것을 심히 괴로워하는 모양으로 두 손을 자리에 짚어 몸을 버티면서 말하였다.
『고대야, 최 선생이 반가와할 터이지. 오죽이나 반갑겠나.』하고 나는 정임을 위로하는 뜻으로 말하였다.
『아이 참 미안해요. 제가 죄인이야요. 저 때문에 애매한 누명을 쓰시고 저렇게 사업도 버리시고 병환까지 나시니 저는 어떡허면 이 죄를 씻읍니까?』하고 눈물 고인 눈으로 정임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정임과 최 석을 이 자유로운 시베리아의 삼림 속에 단둘이 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최 석은 살아나가겠지마는 정임이가 살아날 수가 있을까, 하고 나는 정임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숨은 실낱같은 것 같았다. 바람받이에 놓인 등잔불과만 같은 것 같았다.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한 번 대하겠다는 것밖에 아무 소원이 없는 정임은 참으로 가엾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염려 말어. 무슨 걱정이야? 최 선생도 병이 돌리고 정임도 인제 얼마 정양하면 나을 것 아닌가. 아무 염려 말아요.』하고 나는 더욱 최 석과 정임과 두 사람의 사랑을 달하게 할 결심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이 가엾은 간절한 두 사람의 마음을 가슴 미어지게 아니 생각할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주의 모든 일 중에 정임의 정경보다 더 슬프고 불쌍한 정경이 또 있을까 하였다. 차디찬 눈으로 덮인 시베리아의 광야에 병든 정임의 사랑으로 타는 불똥과 같이 날아가는 이 정경은 인생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 비극인것 같았다.
정임은 지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도 가끔 고개를 들어서는 기운 나는 양을 보이려고, 유쾌한 양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저 나무 보셔요. 오백 년은 살았겠지요?』이런 말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또 기운이 지쳐서는 고개를 숙이고, 혹은 노파의 어깨에 혹은 내 어깨에 쓰러졌다.
마침내 우리가 향하고 가는 움집이 보였다.


『정임이, 저기야.』하고 나는 움집을 가리켰다.
『네에?』하고 정임은 내 손가락 가는 곳을 보고 다음에는 내 얼굴을 보았다.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저기 저것 말야. 저기 저 고작 큰 전나무 두 개가 있지 않아? 그 사이로 보이는 저, 저거 말야. 옳지 옳지, 순임이 지금 나오지 않아?』하였다. 순임이가 무엇을 가지러 나오는지 문을 열고 나와서는 밥 짓느라고 지어놓은, 이를테면 부엌에를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이쪽을 바라보다가 우리를 발견하였는지 몇 걸음 빨리 오다가는 서서 보고 오다가는 서서 보더니 내가 모자를
내두르는 것을 보고야 우리 일행인 것을 확실히 알고 달음박질을 쳐서 나온다. 우리 썰매를 만나자,
『정임이야? 어쩌면 이 추운데.』하고 순임은 정임을 안고 그 안경으로 정임의 눈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앓으면서 이렇게 와?』하고 순임은 노파와 나를 책망하는 듯이 돌아보았다.
『아버지 어떠시냐?』하고 나는 짐을 들고 앞서서 오면서 뒤따르는 순임에게 물었다.
『아버지요?』하고 순임은 어른에게 대한 경의를 표하노라고 내 곁에 와서 걸으며,
『아버지가 오늘은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순임이가 고생하는구나 고맙다, 이런 말씀도 하시고, 지금 같아서는 일어날 것도 같은데 기운이 없어서, 이런 말씀도 하시고, 또 선생님이 일크트스크에를 들어가셨으니 무엇을 사 오실 듯싶으냐, 알아맞혀 보아라, 이런 농담도 하시고, 정임이가 어떤가 한 번 보았으면, 이런 말씀도 하시겠지요.
 
또 순임아, 내가 죽더라도 정임을 네 친동생으로 알아서 부디 잘 사랑해
주어라, 정임은 불쌍한 애다, 참 정임은 불쌍해! 이런 말씀도 하시겠지요. 그렇게 여러 가지 말씀을 많이 하시더니, 순임아 내가 죽거든 선생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 지도를 받아라, 그러시길래 제가 아버지 안 돌아가셔요!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웃으시면서, 죽지 말까, 하시고는 어째 가슴이 좀 거북한가, 하시더니 잠이 드셨어요.
한 시간이나 되었을까, 온.』
집앞에 거의 다 가서는 순임은 정임의 팔을 꼈던 것을 놓고 빨리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치마폭을 펄럭거리고 뛰는 양에는 어렸을 적 말괄량이 순임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나는 혼자 웃었다. 순임은 정임이가 왔다는 기쁜 소식을 한 시각이라도 빨리 아버지께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 주무시우? 정임이가 왔어요. 정임이가 왔읍니다.』하고 부르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다.
나도 방에 들어서고, 정임도 뒤따라 들어서고, 노파는 부엌으로 물건을 두러
들어갔다. 방은 절벽같이 어두웠다.
『순임아, 불을 좀 켜려무나.』하고 최 석의 얼굴을 찾느라고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숙이며,
『자나. 정임이가 왔네.』하고 불렀다.
정임도 곁에 와서 선다.
최 석은 대답이 없었다.


순임이가 촛불을 켜자 최 석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여보게, 여봐. 자나?』하고 나는 무서운 예감을 가지면서 최 석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마는 최 석은 시체라 하는 것을 나는 내 손을 통해서 깨달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이불을 벗기고 최 석의 팔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거기는 맥이 없었다. 나는 최 석의 자리옷 가슴을 헤치고 귀를 가슴에 대었다. 그 살은 얼음과 같이 차고 그 가슴은 고요하였다. 심장은 뛰기를 그친 것이었다. 나는 최 석의 가슴에서 귀를 떼고 일어서면서,
『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네 손으로 눈이나 감겨 드려라.』하였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하고 정임은 전연히 절제할 힘을 잃어버린 듯이 최 석의 가슴에 엎어졌다. 그러고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순임은,
『아버지, 아버지!』하고 최 석의 베개 곁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아라사 노파도 울었다. 방 안에는 오직 울음 소리뿐이요, 말이 없었다. 최 석은 벌써 이 슬픈 광경도 몰라보는 사람이었다. 최 석이가 자기의 싸움을 이기고 죽었는지, 또는 끝까지 지다가 죽었는지 그것은 영원한 비밀이어서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의식이 마지막으로 끝나는 순간에 그의 의식에 떠오르던 오직 하나가 정임이었으리라는 것만은.
지금 정임이가 그의 가슴에 엎어져 울지마는, 정임의 뜨거운 눈물이 그의 가슴을 적시건마는 최 석의 가슴은 뛸 줄을 모른다. 이것이 죽음이란 것이다.
뒤에 경찰의가 와서 검사한 결과에 의하면, 최 석은 폐렴으로 앓던 결과로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최 석의 장례를 끝내고 순임과 정임을 데리고 오려 하였으나 정임은 듣지 아니하고 노파와 같이 바이칼 촌으로 가 버렸다. 그런 뒤로는 정임에게서는 일체 음신이 없다. 때때로 노파에게서 편지가 오는데 정임은 최 석이가 있던 방에 가만히 있다고만 하였다.

서투른 영어가 뜻을 충분히
발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임에게 안심하고 병을 치료하라는 편지도 하고 돈이 필요하거든 청구하라는 편지도 하나 영 답장이 없다. 만일 정임이가 죽었다는 기별이 오면 나는 한 번 더 시베리아에 가서 둘을 가지런히 묻고 「두 별 무덤」이라는 비를 세워 줄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정임이가 조선으로 오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최 석과 정임에게 대한 이 기록을 믿고 그 두 사람에게 대한 오해를 풀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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