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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6

이광수-유정, 1 유정[有情]은 춘원 이광수가 1933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러시아의 바이칼 호에서 최석은 ‘믿는 벗 N형’에게 자신과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남정임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편지를 쓰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최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갖힌 친구로 부터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딸인 정임을 대신 맡아 길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친구의 딸인 정임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다. 정임이 성인으로 점점 성장하면서 최석과 정임은 서로 이성적인 사랑을 느끼게 되고, 이를 눈치챈 최석의 부인과 최석사이에 불협화음이 생긴다. 정임은 최석이 교장으로 있는 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런데 어느날 정임은 도쿄에서 폐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 2011. 10. 29.
이광수-유정, 2 멈추고 내 아내와 정임을 번갈아 보아 가면서 말하오. 『무얼 잘해 준 게야 있나요.』하고 내 아내는 겸양의 수삽한 빛을 보이며, 『정임이는 원체 얌전하니까 도무지 말을 일리지 아니하였답니다. 되려 순임이가 말을 일리지요.』하고 순임을 돌아봅니다. 다들 순임을 보고 웃었소. 나도 하도 유쾌하여서 소리를 내어 웃으며, 『우리 순임이는 남자 칠 분에 여자 삼분이어든. 하하하하.』 하고 농담을 하였소. 또 다들 웃었소. 그러나 나는 순임의 낯빛이 파랗게 질리고 눈이 샐쭉하는 것을 보았소. 그리고 내 아내의 낯빛에도 불쾌한 빛이 도는 것을 보았소. 나는 「아차」하고 놀랐으나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소. 이때에 정임은 삼지창을 들다가 도로 놓으며 고개를 숙이는 모양이 내 눈에 띄었소. 아 과연 정임은.. 2011. 10. 29.
이광수-유정, 3 T 대학 병원 S 내과 X 호 병실이 정임의 병실이라는 것은 아까 키 큰 여학생 김에게서 들었소. 어쩌면 김이 나를 병원까지 안내해 주지 아니하였을까. 어쩌면 김의 태도가 그렇게 냉랭하였을까 하면서 나는 X호실을 찾았소. X호실이라는 것은 결핵 병실인 것을 발견하였소. 침침한 복도로 다니는 의사, 간호부들이 가제 마스크로 입과 코를 싸매고 다니는 것이 마치 죽음의 나라와 같았소. 어디나 마찬가지인 심술궂게 생긴 「쓰끼소이」노파들의 오락가락하는 양이 더구나 이 광경을 음산하게 하였소. 『남 정임은?』하고 나는 간호부실 앞에서 모자를 벗고 공손하게 물었소. 병원에서는 간호부가 제일 세도 있는 벼슬인 줄을 알기 때문이오. 『X호실.』하고 뚱뚱한 간호부가 나를 힐끗 보며 냉담하게 대답하더니, 『남 정임 씨는 면.. 2011. 10. 29.
이광수-유정, 8 스러지자는 우리는 철학자도 …… 시인도 아니지마는 우리들의 환경이 우리 둘에게 그러한 생각을 넣어 준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가만히 드러누워 있는 것을 저이가 물끄러미 보고 있더니 자기도 내곁에 들어와 눕겠지요. 그런 뒤에는 황혼에 남은 빛도 다 스러지고 아주 캄캄한 암흑 세계가 되어버렸지요. 하늘에 어떻게 그렇게 별이 많은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참 별이 많아요. 우주란 참 커요. 그런데 이 끝없이 큰 우주에 한없이 많은 별들이 다 제자리를 지키고 제 길을 지켜서 서로 부딪지도 아니하고 끝없이 긴 시간에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주에는 어떤 주재하는 뜻, 섭리하는 뜻이 있다 하는 생각이 나겠지요. 나도 예수교인의 가정에서 자라났지마는 이때처럼 하나님이라 할까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 2011. 10. 29.
이광수-유정, 10 며칠 후에 순임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것은 하르빈에서 부친 것이었다——. 『하르빈을 오늘 떠납니다. 하르빈에 와서 아버지 친구 되시는 R 소장을 만나 뵈옵고 아버지 일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둘이서 찾아 떠났다는 말씀을 하였더니 R 소장이 대단히 동정하여서 여행권도 준비해 주시기로 저희는 아버지를 찾아서 오늘 오후 모스크바 가는 급행으로 떠납니다. 가다가 F 역에 내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정임의 건강이 대단히 좋지 못합니다. 일기가 갑자기 추워지는 관계인지 정임의 신열이 오후면 삼십팔 도를 넘고 기침도 대단합니다. 저는 염려가 되어서 정임더러 하르빈에서 입원하여, 조리를 하라고 권하였지마는 도무지 듣지를 아니합니다. 어디까지든지 가는 대로 가다가 더 못 가게 되면 그 곳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 2011. 10. 29.
이광수-유정, 11 ◀이광수의 '유정' 첫 페이지 부터 보기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이 생각을 죽여야 한다. 다시 거두를 못 하도록 목숨을 끊어 버려야 한다. 이것을 나는 원한다. 원하지마는 내게는 그 힘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종교를 생각하여 본다. 철학을 생각하여 본다. 인류를 생각하여 본다. 나라를 생각하여 본다. 이것을 가지고 내 애욕과 바꾸려고 애써 본다. 그렇지마는 내게 그러한 힘이 없다. 나는 완전히 헬플리스함을 깨닫는다. 아아 나는 어찌할꼬? 나는 못생긴 사람이다. 그까짓 것을 못 이겨? 그까짓 것을 못 이겨? 나는 예수의 광야에서의 유혹을 생각한다. 천하를 주마 하는 유혹을 생각한다. 나는 실달라 태자가 왕궁을 버리고 나온 것을 생각하고, 또 스토아 철학자의 의지.. 2011. 10. 29.